중학교 1학년 시절, 같은 반 여자 아이를 좋아했었다. 이름은 로이. 그렇다. 드라마 주인공스러운 이름이다. 그 친구를 좋아했던 이유는 아마도 귀여워서일 것이다. 지금 기억으론 단발머리, 처진 눈, 뽀얀 피부, 코 근처에 점(정확히 위치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긴장 가득한 중학생 첫 시작에 그 소녀를 좋아했었다.
로이는 활기찬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시시한 말에도 잘 웃어주었다. 나는 그런 면이 좋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웃기고 싶은 욕심에 썰렁한 말이 나와도 로이는 환하게 웃었다. 내 농담이 진짜 재밌어서 웃었는지, 습관적으로 웃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로이와 친한 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친해진 것일 수도 있다. 로이는 짝꿍이었다.
아마 우리 반에서 나뿐 아니라 많은 남자아이들이 로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상냥했다. 다들 그런 면을 좋아했을 것이다. 그리고 몇몇은 착각에 빠졌을 수도 있다. 혹시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나처럼 말이다.
어느 날 결심이 섰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이 솟구쳤다. 그녀에게 내 마음의 상태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마도 당시 나는 설레는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확인하고 키워가는지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점심시간, 다들 밥을 먹고 각자 무리 지어 떠들고 있었다. 나는 로이에게 다가가서 할 얘기가 있다고 잠깐 나가자고 했다. 로이의 표정을 보니,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평소와 같지 않은 긴장된 내 태도를 보면 누구든 그랬을 것이다. 운동장 구석 체육관 옆 쪽, 벤치에 앉았다. 나는 일어서서 말을 하려 했지만, 로이가 자연스럽게 앉았다. 나도 따라 앉았다. 그리고 어떤 틈도 없이 내 마음을 쏟아냈다. 이걸 고백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마음의 상태를 서투르게 뱉어내는 것. 그게 나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로이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승낙한 것도 아니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묻고 싶었다. 물론 입 밖으로 그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그렇게 교실로 돌아갔다.
아마도 일주일 정도 뒤였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일주일 동안 로이를 어색하게 대했던 것 같다. 로이는 신경치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실제로 신경 쓰이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일주일이 되던 날, 로이는 내게 오늘 점심시간에 체육관 쪽에서 보자고 말을 건넸다. 아니, 쪽지였나?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분명할 말이 있다고 체육관에서 보자고 했다. 난 설레발을 잘 떠는 스타일이다. 호들갑에 호들갑을 떠는 편이다. 겉으로 봤을 땐 티가 안 나지만, 속으론 로이와 연애에 대해 상상을 하고 있었다. 빼빼로데이를 상상하고, 투투를 어떻게 보낼지 상상했다.
점심을 먹고 체육관으로 갔다. 로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 설레발이 걸음을 서두르게 한 모양이다. 나는 체육관 벽에 기대어 로이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가 왔다. 우현이와 함께.
우현이는 같은 반 친구이다. 나와 꽤 친한 친구다. 나도 사람들을 웃기는 것을 좋아하고, 우현이도 그러했다. 서로 경쟁하듯 여러 농담을 뱉어내고, 선생님 성대모사를 뽐내던 사이다. 그런 우현이가 로이와 함께 왔다. 로이, 우현, 그리고 나. 우린 체육관 옆에서 모였다. 우현이의 표정을 보니 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 우현이도 나를 그리 보았겠지.
로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서론을 없었다. 우현이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로이에게 고백을 했었다고 한다. 우현이 자식, 안 그런 척하더니만. 우현이가 로이에게 마음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내가 눈치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으나, 아무튼 그랬다. 로이는 이어서 말을 했다. 자신은 우현이와 내게 고백을 받았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둘 중 한 명을 선택하지 못하게 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그럼 어쩌지, 하고 난감했다. 그때 로이가 해결법을 제시했다. 우리 둘 모두 사귀는 것이 어떻냐고 했다. 나도 좋고 우현이도 좋으니 남자친구를 두 명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나는 얼굴이 뜨거웠다. 속으로 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당시 중학생 1학년이었던 나는 '나쁘지 않겠는데?'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 제안은 이뤄지지 않았다. 우현이가 기분 나쁘다고 말하며 자리를 먼저 떴다. 나는 어쩔 줄 몰라 어물쩡 되었다. 로이는 내게 미안하다며 우현이를 따라갔다. 나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둘을 보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얼굴은 여전히 뜨거웠다. 초등학생 때 서너 번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모두 거절을 당했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고 나서 첫 거절이었다. 역시나 그렇지,라는 생각이 떠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는 연애를 시작했다. 우현이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다. 옆 반의 키 큰 남자애와 사귄다고 소문이 났다. 중학생 시절, 연애 소문은 참 빠르게 퍼졌다. 마치 연애 전문 기자가 있던 것처럼 순식간에 퍼진다.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점심시간, 급십실로 가는 길에 로이가 그 남자애와 손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마음이 씁쓸했다. 초등학생 때 겪었던 씁쓸함 보다 더 공허한 씁쓸함이었다. 아마 중학생이 되어서 그렇겠지. 나도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겠지. 뭐,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우현이와 나는 다시 친하게 지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우현이와는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얼마나 반가운지) 로이와는 그 뒤로 만난 적이 없다.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갔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녀의 기억은 중학교 1학년이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