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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MIGING Aug 17. 2022

악의 고리: 이직 시도와 이직 포기

난임과 직장생활, 그 딜레마 8

임신을 시도한 지 수개월이 지나고 있다. 뭇 난임부부가 그렇듯 우리 부부도 이렇게 임신 시도 기간이 길어지게 될 줄 몰랐고, 또 얼마나 더 길지 예상이 안된다. 이 예측 불가한 기다림 때문에 일상에서 잠시 멈춰야 할 것들이 늘어간다. 짧게는 약품들과 음식, 주류 등이 있다. 좀 더 장기적인 시점에서는 3개월 단위로 끊는 운동권 조차도 혹시나 중간에 임신되면 회원권 정지가 가능한지 살피고 결제하게 된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직장에 대한 회의감이 들고 이직의 욕구가 솟구친다면 그야말로 대환장할 노릇이다.


전 회차에서 직장생활의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다뤘었다. 몇몇 고참의 회사 동료들과 친정에서는 공무직의 안정성과 보장된 지위를 높이 평가한다. 삶의 연륜이 있어서인지, 이미 아이들을 키워봤어서인지, 그들은 '막상 아이를 낳으면 이만한 직장이 없다'며 나의 불만사항을 듣고서도 현 직장의 긍정적인 부분들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장점들은 내가 이 직장으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으니 부정할 부분이 없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다가 퇴사 생각이 절실할 때에도 '참을 인'자를 되새기며 임신이라는 좋은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만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임신은 되지 않았다. 업무로 인한 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 난임 클리닉에의 잦은 왕래로 심신이 지쳐버린 끝에 난임을 사유로 질병휴직을 냈다. 처음 한  주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런 생각 없이 잠자고 싶을 때 잠자고, 낮에 햇빛을 받고, 주중에는 가고 싶었던 공간을 방문하면서 치유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쉬는 날들이 길어지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다.


'쉬는 동안 현 회사를 탈출해야겠다!' 기력을 조금 회복하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한동안 컴퓨터와 마주 앉아 나를 소개하는 다양한 버전의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작성해 보았다. 오랜만에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내 커리어를 활용할 수 있는 채용공고를 골라 이곳저곳 공략했다. 게 중에는 영원히 소식 없던 곳도 있었고 감사하게 면접 연락 온 곳도 있었다. 사이트에 올라간 이력서를 좋게 봐준 기관에서 먼저 이직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난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임신이라는 기약 없는 조건이 족쇄처럼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임신이 불행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기 소식을 기다리는 그 어느 부부 못지않게 임신의 축복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끝이 언젠지 모르는 난임 여성의 '임신 시도'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무거운 실재다.


욕심과 패기만 앞서 이직의 문을 두드리는 나는 다음과 같은 악순환을 돌고 돈다.


이직 결심

먼저, 이직을 굳게 결심하고, 어디든 현 직장보다 낫겠다며 채용공고를 탐색한다. 실제로 지금의 경력으로 두드릴 수 있는 회사들은 웬만해서는 현 직장보다 연봉이 높다. 그것만으로 큰 위안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괜찮은 공고를 추려본다. '임신이 되든 안되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 '좋은 직장에 일단 붙기라도 한 다음에 나머지 고민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이력서를 무작정 넣는다.


양심의 가책

그런데 막상 서류에 합격하면 이 상황에서 면접을 모든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지 고민과 불안이 급격히 커진다.

'일단 면접을 잘 본 다음에 혹시라도 붙으면 그때 임신에 관해 상의해 볼까?'

'그래도 내일모레 난임시술을 받는 상황에서 인사과에 임신의 가능성을 미리 말해야 하지 않을까...'

'가만, 아직 임신도 안 했고 1년 뒤에나 될지도 모르는데 굳이 신경 써야 할까?'

'혹시 이번 달에 이직하고 다음 달에 시험관에 성공하면 어떡하지?'

이와 같은 여러 경우의 수들이 머릿속을 마구 휘젓는다. 정신분열병 환자들은 여러 목소리가 들린다는데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채용 조건과 포기

고민하는 중에 채용공고를 다시 읽어본다. 그러면 '근무조건 및 처우' 부분에 회색 글씨로 적혀 있어 지나쳤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습기간 3개월', '수습기간 6개월', '1년 계약 후 정규직 전환', '수습기간 근무평가를 통한 정규직 전환' 등.

예전에는 마음에 크게 걸리지 않았던 단서조항들이 현재 위치에서는 너무도 큰 장애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임신은 아직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어린 나이에 '수습기간'은 회사에 적응하는 시기로, 큰 과실이 없는 한 당연히 무탈하게 지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진데, 괜히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지레 겁먹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임밍아웃(임신+커밍아웃)을 언제든 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수습기간에 임신하면? 아직 계약직인데 임신하면? 내가 회사 입장이라면 계약을 연장해줄까? 스스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해본다. 결과는 늘 '포기하자'로 끝난다.


한 번은 포기하기가 너무 아까웠던 포지션이 있었다. 서류전형을 통과 후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수습기간은 6개월, 회사 문화가 확고하고 전환율이 높진 않다고 알려졌다. 그래도 그냥 포기하기엔 아까운 포지션이라, 조금은 솔직해져 보기로 마음먹었다. 합격 소식을 알려준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ㅁㅁ포지션에 지원한 ㅇㅇㅇ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내일모레 면접 갖기로 했는데, 제가 임신될 가능성이 있어서요..."

"아... 그럼 개인 사유로 지원 포기라고 말씀드리면 될까요?"

"아... 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스로도 자신이 없는 베팅이라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내심 다른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길 바랐다. 그런데 너무 예상했던 방향으로 대화가 간결하게 끝나자 더 이상 질문하거나 어필하는 것이 미련하게 느껴졌다.


내적 갈등을 한껏 하고 나면 정신적으로 피로해진다. 심지어 여러 시간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 '포기'라면 허탈감이 크다. 마치 능력이 없어 이직도 못하는 커리어 포류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 악순환을 몇 번 번복하니 이제는 내 진로에 대한 회의감마저 든다.


'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라고 자신만만했던 나는 사라지고 현재 직장 아니면 내가 있을만한 곳이 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한없이 작아지고 소심해진다. 오랫동안 납치·감금된 사람은 일시적으로 자유를 줘도 바깥세상이 두려워 떠나지 못한다고 한다. 아직 오지 않은 임신이라는 프레임에 스스로 감금된 게 아닐까.


그나저나 첫 번째 면접 제안을 포기하고 벌써 3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임신 소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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