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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Feb 23. 2024

카페에 앉아있던 장애인

장애를 안고 외출한다는 것

한가한 오후의 카페였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켜놓고 일기를 쓰고 있는데, 일그러진 얼굴의 장애인과 그녀의 보호자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들어와 바로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보호자가 주문을 하러 자리를 비운 그 짧은 순간에도 장애인은 연신 괴성을 지르며 의자에 앞뒤로 몸을 박아댔다. 그녀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옆 테이블의 아주머니 두 분이 놀란 눈으로 뒤돌아보다가 이내 자신들이 하던 대화로 돌아갔다. 실내의 웅성거리는 소음에 섞여 "저런 애들이 있는데..."로 시작하는 소리 죽인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나 역시 앞 테이블에 시선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곁눈질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평소 카페에 자주 가서 앉아있곤 하지만 꽤 오랫동안 카페에서 장애인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적장애이든 지체장애이든 양쪽 다 보지 못했다. 특히 시내 번화가처럼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갈수록 말이다.


장애인들이 길거리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로 대부분 우리나라의 보잘것없는 인프라와 존중되지 못하는 이동권을 꼽곤 한다. 미국에서 잠시 생활할 때, 버스 문 앞의 리프트가 내려지고 휠체어가 올라갈 때까지 몇 분이고 그 자리에 멈춰 서있던 버스 기사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가 그날 한 행동은 딱히 특별하지도, 영웅적이지도 않았다. 그 도시에서는 모든 버스 기사들이 그렇게 일했으니까. 지하철에 무심코 앉아있는데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 내게 당당히 복지카드를 내밀며 자리를 양보해 주기를 요구한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좀체 있을 수 없는 희귀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염치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대중교통 좌석에 남들보다 먼저 앉는 일이 그의 당연한 권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프라와 이동권 외에도 문제가 되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비장애인들의 따가운 시선 또한 아득한 장벽이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장애인, 특히 지적장애인이 집 바깥으로 좀처럼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냉대 받는 이유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이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공공장소에 가본 사람은 안다. 아이들이 얼마나 오롯이 자기중심적인지. 보호자 입장에서 그들의 언행에 대해 얼마나 주변에 민망하고 죄송스러운지. 흔히 지적장애인을 두고 O살이나 OO살의 어린아이와 비슷한 지적 수준이라고 빗대곤 한다는 걸 고려해 보면, 그들의 보호자 또한 어린아이들의 보호자와 비슷한 곤란을 밖에 나설 때마다 겪게 될 것이다.


얼마 후 보호자가 돌아와 주문한 음료를 건네고 빵을 먹이자 방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며 몸을 흔들던 장애인은 금세 조용해졌다. 가끔씩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내곤 했지만 그건 그녀 나름대로의 의사소통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그녀와 보호자가 둘 다 자리를 비웠다.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 또한 부자유한지 어기적거리며 걷던 그녀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들이 완전히 자리를 뜬 후, 나는 문득 통유리로 이루어진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는 "현화 로데오"라는 별칭이 붙은, 내가 사는 읍내의 중심가다. 금요일 저녁이 다가옴에 따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는 시간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장애인이나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그러한 풍경이야말로 일상이라는 것처럼, 내 앞 테이블에 앉아 빵을 먹던 장애인과 보호자의 모습이 비일상이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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