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를 떠나보낼 시간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자'
오늘 아침 마흔다섯번째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 건넨 말이다.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어졌고 나이듦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시기가 되어버렸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젊음에 대한 미련과 질투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극복의 이야기다. 누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자연의 순리이고 법칙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진행되는 까닭에 쉬이 깨닫지 못하고 지내기 일쑤다. 그러다 어느날 아침 깊이 패인 팔자 주름과 부쩍 늘어난 흰색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당황하곤 한다. 혹은 오랜만에 나간 동창회에서 확연히 변한 친구들의 모습에 나이듦을 절감하기도 한다. 그리고 부랴부랴 염색을 하고 보양식들을 찾아나선다.
우리네 같은 일반인들도 젊음의 끝자락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오던 여배우의 마음은 오죽하겠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제작노트에 줄리엣 비노쉬와의 대화에서 영감을 받았고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히기도 했다.
주인공 마리아(줄리엣비노쉬)는 중년의 여배우다. 그것도 화려한 이력을 지닌 세계적인 여배우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의 출세작이었던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 연극 출연 제안이 온다.
20년전 그녀는 그 작품에서 동성의 상사 헬레나를 유혹하고 버림으로서 헬레나를 파멸로 이끌었던 팜므파탈 시그리드를 연기했다. 18세 어린 소녀를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에게 제안된 역은 시그리드가 아닌 헬레나다.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시그리드의 기억에 갖혀있는 마리아는 출연을 거절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비서 발렌티(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조언과 감독의 설득으로 출연을 결심하고 실스마리아 별장에서 대본 리딩을 시작한다.
발렌티와의 대사 연습은 연극과 실제를 넘나든다. 그녀들의 대사는 연극대본이자 속내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여전히 과거만을 바라보고 발렌티는 그런 그녀에게 젊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소리친다.
뱀처럼 휘감겨오는 구름을 보기위해 말로야 계곡에 오른 날. 발렌티는 마리아를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다. 지난 가을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이 장면에서 생각이 막혔었다. 감독은 왜 그녀를 떠나보냈을까?
발렌티는 마리아가 그토록 집착했던 젊음 그 자체였다. 지난 시절에 대한 애착이었고 미련이었다. 그녀와의 대사 연습과 논쟁은 지난 날의 마리아 자신과의 내적 갈등이었고 극복의 과정이었다.
감독은 지난 젊음에 대한 미련을 발렌티를 떠나보내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마리아는 성공적으로 헬레나로 거듭 태어난다.
나이 든다는 것, 늙는다는 것. 아쉽지만 속절 없는 일이다. 지난 시절에 대한 미련은 옅은 그리움으로만 남겨두고자 한다. 그래야만 다가올 시간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한달 후면 나도 마흔다섯번째 생일을 맞는다. 나 역시 나의 발렌티를 떠나보내고 또 다른 무대위에 오를 준비를 해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