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쓰고 싶게 해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최성운의 사고실험> 조수용님편. 수용님에게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질문과 답이 오가던 중 ‘분기점’이라는 단어가 탁 걸렸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어떤 계기들이 분기점처럼 이어지다보니 진짜로 좋아하게 된 것 같다는 대화에서 건진 단어였다. 그래, 분기점. 내가 20년 넘게 기록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에도 분명 그런 분기점들이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시작을 돌아보려 한다.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던 일곱살의 나는 먼저 말을 거는 법을 몰랐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 한쪽, 책장이 있는 구석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거나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는 방법도 몰랐지만 가만히 있는 것도 썩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런 내 모습을 본 친구와 선생님이 “글씨 예쁘다”, “그림 잘 그린다”하고 말해주었다.
그날 이후로 하나둘 친구들이 다가왔다. “이것도 그려줄 수 있어?”, “여기에도 써줄래?” 내 무릎 위엔 스케치북이 차곡차곡 쌓였고, 나는 말없이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있었다. 먼저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누군가 다가와 주는 건 참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관심받고 싶은데 나서지 못하는 아이’, 조용한 관종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잘 쓰고 싶었고, 더 예쁘게 그리고 싶었다.(주로 공주를 그렸는데 치맛단이 늘어나고 장식이 화려해졌던 것으로 기억난다) 글씨를 쓰는 일이, 누군가와 이어지는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으니까.
그 후로도 비슷한 장면들이 반복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필기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학급일지나 회의록을 맡게 되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시험 기간마다 오답 노트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듣는 게 자연스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계속해서 ‘기록하는 쪽’에 서 있었다. 노트는 점점 늘어났다.
수업 노트, 오답 노트, 일기장, 교환 일기, 그리고 이름 없는 낙서 노트까지. 무언가를 쓰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도 조금씩 선명해졌다.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대세였던 2002~2006년, 그러니까 나의 대학생 시절 제일 많이 소비했던 건 mmmg(밀리미터 밀리그람) 라는 브랜드의 문구와 작은 악세사리들이었다. 미니홈피를 파도타기 하다보면 유난히 시선이 멈추는 사진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스마일 얼굴에 양팔을 벌린 컬러풀한 키링이 등장했다.(mmmg의 대표 상품이었던 베이비홀더) 그 키링이 있는 미니홈피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취향이 분명했다. 파스텔톤의 색감, 필름카메라로 찍은 듯한 사진, 그에 꼭 어울리는 bgm, 화이트로 단정하게 맞춰진 미니룸. 그 시절 내가 동경하던 감각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취향의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이 바로 ‘mmmg mania’라는 싸이월드 클럽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그곳을 들락거리며 어느새 덕후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mmmg는 경복궁점, 안국점, 명동점까지 세 곳의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교보문고에도 입점해 있었다. 주말이면 도장 깨듯 매장을 돌며 문구를 모았고, 어느 날은 홈페이지에 게릴라성으로 올라온 ‘해피마트(창고 개방 할인 이벤트)’ 공지를 보고 비 오는 토요일, 200번 버스를 타고 파주까지 가 배수열 대표님을 직접 만나 사인을 받기도 했다. 연예인이 아닌 대상에게 이토록 진심으로 빠져본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mmmg 디자이너 채용에 세 번이나 지원했을 정도였다.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첫 직장으로 들어간 곳이 신사동 가로수길의 디자인 에이전시였고, 그 무렵 mmmg가 바로 그 거리에 새 매장을 열었다. 그래서 나의 첫 업무 다이어리는 mmmg였고, 점심시간 산책 코스도 늘 그쪽이었으며, 퇴근길에도 괜히 한 번쯤은 매장 앞을 서성였다.
왜 그렇게 mmmg가 좋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단순히 예뻐서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디자이너가 만든 브랜드’라는 느낌이 강했다. 보는 사람을 잡아당기는 화려함보다는, 쓰는 사람을 배려한 구조와 여백이 먼저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색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별색(팬톤 컬러)을 과감하게 쓰면서도 형태는 최대한 단순하게 유지하는 균형감. 디자인이 앞에 나서기보다, 쓰는 사람의 생각과 기록이 중심이 되는 느낌. 노트 위에 무엇을 적든, 그 공간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기분이었다. mmmg의 문구를 쓰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조금 더 제대로 쓰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이미 나는 무의식적으로 ‘디자인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디자인을 만드는 사람의 시선’을 배우고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