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라는 지구의 외핵에서 탈출하다

지구과학을 좋아했던 구성원의 퇴사 결심

by 리나


정말 다니고 싶었던 회사에 입사했던 2023년 1월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회사에 합격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입사 직전의 22년 12월은 가장 행복했던 한 달이었다.


입사하고 나서도 행복했다.

입사하자마자 정말 많은 일을 맡게 되면서 원래 직급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수습이 1개월 길어져도,

수습 통과까지 너무 힘들어서 살면서 처음 회사에서 울었어도 행복했던 것 같다.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니 나는 이 회사의 표면적인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도 당연한 것이 회사에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표면적인 내용에 대해서만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업계에서 그래도 네임드이고, 이 정도 규모의 사옥과, 이 정도 규모의 구성원. 그리고 그 회사에서 행복한 나.




지리학과를 나온 사람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지구과학을 좋아했던 사람이라 그런가.

회사는 하나의 지구처럼 느껴졌다.

회사의 표면적인 모습은 지구의 지각이고,

지각 위 대륙들은 부서들,

대륙들이 떠있는 바다는 이해관계자(대표나 C레벨, 외부 요인 등)이다.

지권2.jpg 출처 : 똑스(https://edu.dokdok.co/post-5/1681970632619x940559345137221600)


겉으로 보기엔 '와, 부서들끼리 잘 떠있구나. 바다들이 대륙들을 잘 받치고 있는 걸 보니 완벽한 행성이구나!' 할 수 있겠지만, 착륙(입사)해 봐야 알지.



지구에 착륙하고 1년 쯤 되었을 때, 점점 속까지 들어가는 일을 마주하게 된다.

맨틀까지 들어가 본 사람들 중에서는, 대류현상을 견디지 못해 다시 딱딱한 지각으로 올라오기도 하고,

이왕 맨틀까지 들어가 본 거 '나는 더 깊게 일해보고 싶다' 하고 외핵 행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중 후자였다.



물론 맨틀은 유동성이 있지만 고체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지각에서처럼 잘 밸런스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핵은 액체였다.


중심부에 들어갈수록 단단한 고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구과학을 떠나 말해보자면 '체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체계는 더 깊은 내핵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외핵은 액체였다.

내가 알았던 회사의 모습과 전혀 다른, 소용돌이만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 회사라는 지구의 내핵에 더 접근할수록 실망이 더 많이 밀려왔다.

외부에서 보여지는 지각에서의 회사는 이러지 않았는데.

맨틀에서도 휘청거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외핵에서 청한 도움들은 지각까지 닿지 않았고, 내핵을 통과하지 못했다.

내핵의 사람들은 이미 그들만의 단단한 고체 세상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각의 사람들은 '들어갈 때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한 거야?'라고 말했고,

내핵의 사람들은 '원래 이 지구는 그래'라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했다.

맨틀의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나처럼 외핵 생활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내핵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세상에 이 지구가 하나뿐인 것도 아닌데!' 하는 깨달음이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이 불완전한 지구를 탈출했다.

스스로를 핵심 멤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도저히 배울 점이 없었고, 맨틀의 대류 현상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이 회사는 나아질 기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탈출 후 이미 지구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과 만나며 '지구 밖 생활'에 대한 조언도 들었다.

'이 지구만이 답은 아니야'라는 말도 들었고, 지구 밖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찾아봤다.

그렇지만 그 중력이 그리워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마음, 안정적인 궤도를 그리며 살고 싶은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우리 태양계 말고도 다른 태양계가 있을 것이고, 다른 중력을 가진 행성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중력이 있는 다른 지구, 다른 행성을 찾아보려고 한다.

면접도 보고, 나와 잘 맞는 행성의 조건도 생각해보면서 다시 중력을 찾아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