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이웃들을 종종 만난다.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이웃주민들에게 인사를 하는 예절을 가리켰던 터라 우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인사를 건네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작은 도전이다. 우리 아이만 봐도 어느 날부터는 쑥스럽다는 이유로 삐쭉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녕하세요' 이 단 한마디의 인사로 엘리베이터의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는 금세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지금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뿐이지만 예전에는 이웃들과 굉장히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주민들이 누군지 모두 알았고 심지어 이웃동네 어른들까지 알았으니 말이다. 어릴 적 같은 하늘 아래 한 동네 살았던 이웃들과의 따스한 기억들이 내게 추억으로 가득하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인생 첫 전학을 경험했다. 그때 내 인생의 1차적 격변기(?)를 겪었던 것 같다. 어릴 때 이사를 해 본 사람들은 살던 지역을 벗어나 친구들과 헤어져 전학을 간다는 사실이 그 나이대의 엄청난 이슈였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엄마가 어느 날 이사 가야 한다고 했을 때 산 아래 위치했던 따뜻한 동네를 떠나는 게 너무 나도 아쉬웠다. 지금 생각하면 산비탈을 깎아 만든 동네에 어찌 빌라나 주택을 지었나, 또 우리 가족은 어떻게 저기에 살았었나... 하면서 엄마가 이사를 잘 갔네 하지만, 그때는 이사를 간다는 게 정말 싫었다. 너무 슬펐다.
작은 동네라 아이들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진 않았지만 같은 동네에 사는 언니, 오빠, 친구, 동생들이 모두 친했다. 그중에서 나는 척척박사 예쁜 현주 언니를 참 잘 따랐다. 우리 집 옆 빌라에 사는 언니였는데 언니네 집에 가면 예쁜 마루 인형이 있었고 두세 살 어린 나를 친동생인 남동생보다 더 아껴주었다. 그리고 동네에서 심술궂은 언니가 내 소꿉놀이를 빼앗아 가고 괴롭힐 때마다 현주 언니는 항상 전면에서 나를 지켜준 언니라 특히나 좋아하고 의지했다.
그렇게 친언니라고 생각했던 현주 언니를 두고 편안한 동네를 떠나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다니... 내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엄마에게 이사 가기 싫다고 목청껏 울기도 했다. 그래봤자 나와 똑같은 어린이인데 12살 현주 언니를 붙잡고 이사 가는 문제를 심각하게 상담하기도 했다.
이사를 가는 날, 샛파란색 봉고차에 짐이 모두 실리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현주 언니와 작별인사를 했다. 언니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꽃무늬 아이보리색 천지갑과 편지를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비록 사는 곳은 멀리 떨어지지만 서로 잊지 말자는 약속도 했다. 시간이 흘러 거리가 멀어진 만큼 언니를 만나는 시간도 줄어들고 멀어져 갔다. 자연스레 서로 잊지 말자는 약속도 희미해져 사라졌지만 현주 언니는 낯선 동네에서 살아갈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써 내려간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자신의 머릿속 어딘가 깊숙이 저장되고 얼마 후 애써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잊힌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가 먹을수록 소중한 기억의 조각이 되어 더욱 또렷하게 새겨진다. 그리곤 불쑥불쑥 떠올라 마음을 몽글몽글 따스하게 한다. 우린 이 기억의 조각을 추억이라 부른다.
나는 추억의 힘을 어른이 되고야 나서 알았다. 어렸을 땐 어른들이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그럴 때마다 왜 그리 같은 이야기만 할까? 할 이야기가 이것밖에 없나? 매번 하는 이야기인데 뭐가 새롭다고 그리 재밌을까? 그저 지겹다고만 생각했었다. 나이 들고 이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른들은 당신들의 마음속에 저장된 또렷한 추억의 힘을 빌려 각박한 세상, 지친 마음을 달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쯤 간직하고 있는 추억의 힘이 그런 거다. 인생의 고민과 애환으로 축 처진 어깨를 들썩거리게 해주는 피로회복제! 힘든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게 해주는 뿌리 같은 존재말이다.
나무가 꼿꼿하게 하늘로 뻗어가기 위해 굵은 뿌리를 굳게 내리고 잔뿌리를 사방에 펼쳐 지지하듯, 삶의 풍파에 맞서 살아가는 데 '나'라는 나무가 하늘로 쑥쑥 뻗어나가도록 추억이라는 이름의 잔뿌리를 인생의 곳곳에 펼치면 좋을 것 같다.
요즘은 다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하루를 살아가기에만 집중한다. 추억을 만들고 이야기할 여유조차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이번 추석에는 사람 냄새 사라지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인간적인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가끔은 추억을 안주삼아 이야기하며 인생의 한 순간 한 순간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명절인사를 기회로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새로운 추억을 쌓는 情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 생각만 해도 가슴 따뜻해지는 삶 아닌가! 이런 소소한 작은 추억을 쌓아 당신의 마음속 보물상자에 가득 쌓아두면 좋겠다. 당신의 인생여정에 더없는 비타민이 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