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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um Sep 13. 2024

'말미잘해삼' 같은 아들 이야기


 ‘나가서만 하지 말고, 집에서도 한번 잘 해보시지...’     


 ‘나가서만 하지 말고, 집에서도 한번 잘 해보시지...’ 그날도 부모교육 강의를 다녀온 날이었다. 아마도 아들이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여느때와 같이, 집에 들어와보니 한창 게임중이었던 아들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날,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내가 들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일들은 종종 있었던지라 별로 신경쓰지 않고 넘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그런 날들이 있었던가 싶다. 단순히 사춘기라 하기에는 좀 과했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아들은 정말 특별한 시간들을 보냈다. 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꼭 해야만 했고, 원하는 물건을 사달라고 조르다가 안사주면 집을 나가서 새벽까지 안들어도기도 했다. 학업과 관련해서는 늘 아빠와 충돌해서 집안 분위기를 어렵게 만들었다. 시험기간에도 게임만 했고, 평소에도 게임을 하다가 성장호르몬이 나오는 시간에는 잠을 자야 키가 큰다면서 철저하게 시간을 지켜서 잠자리에 드는 등, 본인이 하고싶은대로 다 하고 지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당시에 나에게는, 아니 우리 가족에게는 무척이나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나와 너무나 비슷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아들이기에, 그래서 무엇을 원하고 어떤 마음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뼛속부터 모범생인 남편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들이었을 것이다. 시험기간이면 국사책을 통째로 외웠다는 남편의 학창시절의 일화를 들을 때면 놀랐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어머니의 강요로 그렇게 했겠지만 ‘공부를 저렇게 무식하게 해야만 했나?’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이과였던 남편은 문과 과목이 많이 어려워서 책을 그냥 통째로 외워버렸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때면 정말 이해가 안되었다. 나는 학창시절에 ‘공부해라’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는 것을 칭찬해 주셨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셨던 그런 부모님 덕분에 비교적 자유롭고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부모님은 의도치 않게 ‘기질에 맞는 양육’을 하셨던 것 같다. ‘사는게 바쁘셨던 부모님’과 ‘간섭받기 싫어하는 나’는 정말 잘 맞았던 것 같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있는가 보다. 만약 내가 조금 더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면, 내 인생은 조금 더 달라져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은 하기도 한다. 솔직히 내게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보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들이 훨씬 더 많다. 어쩌면 그러한 것들이 자산이 되어 지금까지도 공부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반면, 남편의 학창시절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박봉의 공무원 월급으로 자식들을 공부시켜보겠다고 무리를 해서 강남아파트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목숨걸고 자식공부에 올인했던 어머니 덕분에 남편의 학창시절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남편은 초등학교에서 전과목에서 2개를 틀리고 전교 1등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손바닥을 2대 맞았다고 한다. 무조건 하나 틀릴때마다 한 대씩 맞았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듣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러니 창의성 비슷한게 생겼을리 만무하다. 남편의 학창시절 스토리를 떠올려보면, 아들의 공부 못함은 불성실한 것이고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아들을 그런식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그런 날이 올까?

     

 사춘기에 그냥 거쳐갈 수 없는 ‘게임중독’의 세계에 우리 아들 또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이미 머릿속에 게임으로 가득한데, 그것도 당장에 결실이 보이지 않는 공부들로 채워간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이것은 명백한 진리였다. ‘공부 못하는 아들의 엄마’로 살아가는 창피함만 감수하면, 아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꺼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그냥 아이를 공부로부터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가치관과 대비되는 남편과의 갈등이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모범생이었던 딸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이 가기 시작했다. 일단 남편은 아들이 공부를 안하고 게임만 하는 것은 모두 ‘이기적으로 자신의 것만 챙기며 공부하는 엄마의 무책임함’과 관련이 있다고 단정지었다. 게다가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방치하기까지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시작했다. 또한 모범생인 동생이 얄미웠던 아들은 자꾸 동생을 공격하고 상처주기 시작했다. 거기에 손자만 감싸고 도는 시어머니 때문에 딸은 여러모로 힘든 학창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정말 공부도, 일도, 육아도, 가정도, 다 놓아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믿는만큼 자라는 아이들(박혜란 저)’이라는 책을 거의 외워질때까지 읽었던, 그 내공으로 겨우 버텼던 것 같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아빠가 집에 계실때만’ 공부해도 되니, 제발 ‘공부하는 척’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부끄럽게도 이런 말도 안되는 학습지도를 했던, 그러면서 밖에서는 ‘부모교육 전문가’로 활동했던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들이 가지고 있던 긍정적인 면들을 발견하고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지나다보니 아들은 잘 자라주었고, 덕분에 나도 많이 성장했던 것 같다.      

 이제 성인이 된 아들이 최근에 가족단톡방에 올린 내용이다.      

‘진짜 말미잘해삼같은 내가 허우대 멀쩡하게 자랄 수 있지 않았나 싶은...결핍이 엄청나게 많은 앙상하고 구멍 뻥뻥 뚫린 골다공증 걸린 뼈인 사람인데, 외부의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고 멀쩡해 보일 수 있는 이유는 그 구멍들을 부모님이 채워주셔서가 아닌가 싶다. 진짜 너무너무 감사하다’      

 이 문구를 저장해두고 시간이 날때마다 한번씩 읽어본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힘겨웠던 시간들을 잘 지내온 나를 칭찬한다. 진짜 힘들었는데,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다.                               

 ’언젠가 나의 왕자님이 오실 거야‘ 연주를 들려주는 아들     


  나는 어떤 감정이 들 때, 그 감정과 연관되어 기억되는 ’특별한 음악‘을 떠올리는 습관이 있다. 평소에 아들에 대한 그리운 감정이 느껴질때면 이 음악이 생각난다. Frank Churchill의 ’Someday my prince will come(언젠가 나의 왕자님이 오실 거야)‘는 아들이 틈만나면 플룻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언젠가 아들의 연주를 보다가 이 곡의 선율이 너무 아름답다고, 너무 좋아한다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 아들은 집에 있을때면 너무 지나칠 정도로 이 곡을 연주하곤 한다. 아마도 엄마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나도 어디서든 이 곡의 선율이 떠오를 때면 동시에 아들이 떠오르곤 한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힘겨웠던 그 시절에 대한 보상을 받는 느낌이 든다.      

 아들에 대해 불안함이 느껴질 때마다 스스로 생각하는 문구가 있다. 예전에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 지도교수님이 해주셨던 말이었던 ‘불확실함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만이 학문을 할 수 있다.’ 이 말이 이제야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불확실함을 감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온몸으로 어려움을 겪어내야 하는 건지, 동시에 내 자아가 조금씩 사라져감을 견뎌내야 하는 건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마음을 다해, 불안해하지 말고 지켜봐주기만 해도 아들이 가진 내면의 능력으로 잘 자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성인이 된 아들에게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오늘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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