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초 메두사에서 강남 한복판의 호텔까지
로마에서의 첫 번째 숙소는 팔라초 메두사(Palazzo Medusa)라는 곳이었다. 우아한 이름을 가진 이 숙소는 트라스테베레 지구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캄포 데 피오리, 트레비분수, 나보나광장, 성천사성 등 주요 랜드마크와도 접근성이 좋은 곳이었다. 걸어서 7분 거리에 바티칸이 있다는 것은 호텔스닷컴 투숙객들이 꼽은 팔라초 메두사의 최대 장점이다.
귀국 편 비행기를 타기 위해 돌아온 로마에서의 마지막 이틀은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라는 이름의 B&B에 머물렀다. 도무스 아우레아는 ‘폭군’ 네로의 황금 궁전에 붙여진 이름으로, 네로와 그의 행적을 수치스럽게 여긴 후대 황제들이 허물고 건축 자재를 재활용하는 바람에 지금은 일부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곳이다.
나의 B&B 도무스 아우레아는 고대 유적이 있는 콜레 오피오(Colle Oppio) 공원 근처에 있는데, 주변이 조용하고 평화로워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긴 시간을 로마에 머무는 중에도 나는 바티칸에 가지 않았다. 보수적으로(로마 첫 방문, 5일 이상 체류 등을 모집단의 조건으로 상정하고) 셈을 해보아도 로마 여행자 중 바티칸에 방문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은 아마 채 5%가 되지 않을 것이다.
로마를 떠나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난 오늘, 나는 왜 내가 바티칸에 가지 않았는지를 추측해 본다.
1. 북적이는 인파 때문. 여행 초반 콜로세움과 트레비분수 등지에서 마주했던 사람들의 물결이 나에게 일종의 공포증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여행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설.
2. 우선순위가 아니었기 때문. 랜드마크에 발도장을 찍고 감상하는 것보다 현지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관찰하고 함께 누리는 것을 선호하는 개인의 성향이 반영.
3. 원래 무언가에 닿기 쉬우면 간절하지 않은 법. 첫 숙소가 바티칸과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 오히려 미루다가 가지 못했다는 설.
4. 이교도라서. 실은 내가 불교나 이슬람, 힌두 혹은 사이언톨로지 신자이기 때문. (그나마 불교를 선호하는 편)
5. 교황과 가톨릭을 미워해서. (사실이 아니다)
6. 리산 알 가입!
7. 그냥. 이유도 그냥.
여러 보기를 써놓고 정답을 고민하던 나는 이중 어느 것도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바티칸에 가지 않은 게 아니라, 남겨두고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티칸 외에도 방문하지 않은 로마의 랜드마크는 차고 넘쳤다. 진실의 입,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스타디오 올림피코, 카라칼라 욕장, 세스티우스의 피라미드…
특별한 사건이 없다면 로마가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갈 것이니, 남은 삶의 어느 때라도 다시 방문하면 되는 일이리라. 그러므로 나는 미래의 로마를 위해 바티칸과 일당들을 남겨두고 온 것이다.
한편, 지난 주말에는 서울을 여행했다. 첫날 저녁에는 서래마을과 이태원을, 둘째 날 아침에는 한때 일터였던 테헤란로와 코엑스를 걸었으며, 오후에는 최첨단 돌비사운드로 무장한 영화관에서 ‘듄’을 봤다. 호텔은 서울 여행자답게 강남 한복판에 있는 곳을 예약했다.
호텔에서는 각각 리옹과 몽펠리에에서 왔다는 프랑스 커플과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오리지널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된 그들은 저녁 메뉴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같은 ‘서울 여행자’로서 무언가를 추천한다는 것이 꽤 멋쩍었지만, 한때 이 도시에 살았던 사람의 책임감으로 강남역보다는 신논현역으로, 한국식 중화요리와 한국식 야키토리가 아주 맛있으며, 아직 굴 요리를 먹기에 좋은 시즌이라는 이야기를 건넸다.
프랑스 커플과 헤어지고 약속 장소로 가는 길, 나는 문득 이 도시 서울에도 남겨두고 온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서울도 로마만큼이나 긴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기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