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는 다르다

by 메가스포어 megaspore

취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피하고 피하다 27에 뒤늦게 취업을 했다. 회사원이 가장 싫어한다는 가족 ‘같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가족인가..) 회사가 아닌 진짜 가족끼리 운영하는 조그마한 소수정예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 상사는 직장생활 십년차 여자 과장님이셨는데 회사를 위해 사시는 분처럼 밤낮 가리지 않고 직장에 매달리셨다. 나는 그러한 과장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진심으로 과장님의 인생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어느날 과장님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과장님의 이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 xx(내 이름)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힘들지 않아..^^”

별 것 아닌 한마디였지만 나는 이 말 한마디로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의 행복과 불행을 내가 감히 재단할 수 없다는 것’

나는 아주 오만하게도 그녀를 ‘불쌍한’ 사람으로 단정지었고, 나는 그러한 색안경을 끼고 그녀의 모든 말과 행동, 심지어 인생 전체를 판단했다.

그녀가 일에 쏟아 붓는 열정을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의 어리석은 인생 낭비로 보았고, 그녀의 노련한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스킬은 그저 돈 몇푼 벌기 위해 남에게 눈치 보는 일이 습관화된 결과물로 보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나는 진작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꼈으니 말이다.

그녀가 그녀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나는 나와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몰래 그녀를 비하했고 남몰래 우월감을 느꼈다. 나와 다른 그녀가 인생을 잘 살지 못한다고 증명이 되야 내가 그나마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위안할 수 있지 않은가.

아무 생각없이 타인을 비하하고 제멋대로 판단하는 사람을 그리도 혐오했으면서 나는 남몰래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비겁하게 숨어서 말이다.

나는 현재 시부모님과 살고 있고 오랜 투쟁 끝에 어느 정도 고부간의 평화협정을 한 상태고 아직까진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다. 지인들은 나에게 어떻게 시부모님과 불편해서 함께 사냐고 신기하게 생각하지만 내가 요즘 드는 생각은 이렇다.

‘차라리 맨날 만나는게 낫지 가끔 만나면 더 싫어..-_-;’

매일 하는 행동은 자기가 그것이 좋든 싫든 어느 정도 습관화가 됐기에 싫다는 감정이 덜 일어난다. 하지만 무엇이든 가끔 하려고 해보라. 매번 하려고 할 때마다 보통 의지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러기에 남들 눈엔 내가 항상 불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 나는 딱히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지까지 오기까지 거즌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서도)

그래서 결론은 남들이 보는 나(의 행복)와 실제로 내가 느끼는 나(의 행복)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재벌처럼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하는 돈을 가지면 그래도 걱정이 없을 것 같은데 종종 들려오는 그들의 불행한 소식(을 들으며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게 되는)은 우리가 보통 마땅히 ‘그럴 것이다’ 라고 추측하는 것들이 틀릴 때가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가?

우리는 끊임없는 교육을 받고(열심히 했든 안 했든 간에) 저기 도달하면 행복이 기다린다는 희망을 발판삼아 쉴 새 없이 달려왔다. 게을러지는, 쉬고 싶은 자신을 채찍질 해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잠시의 안도감과 성취감을 맛 본 후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게 남들이 말하던 행복인가? 난 잘 모르겠는데?-_-?’

부모와 사회는 우리에게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메시지를 주었고 우리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회의에 빠졌다.

이것도 아마 보이는 행복과 실제로 느끼는 행복의 극심한 차이에서 온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난했던 우리 부모 세대는 자신들이 도달해보지 못했던 그 이상향에 도달하면 행복이 있을 거라고 믿었고 (어느 가구 잡지에 나오는, 바베큐 파티를 열고 아이들과 큰 개와 함께 공놀이를 하는 서양 가족들이 행복해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믿음에 따라 우리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의 길로 이끌었을 뿐이다. 결과는 비록 물음표지만.

이제는 보이는 행복과 스스로 느끼는 행복이 어쩌면 크게 차이가 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비록 내 눈엔 저게 행복해 보이지만 그것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는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맹목적으로 그저 좋아‘보이는’ 행복을 허겁지겁 쫓아가는 그러한 행복사냥을 멈춰야 한다. 나와 그들은 아주 다를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제는 나의 행복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저 누가 이렇게 하니 행복해 보이더라 정도의 막연한 ‘그럴 것이다’ 란 추측 보다는 내 몸의 감각을 믿는 것이 차라리 더 신뢰할 만 하다.

어떤 일을 했을 때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가슴이 시원해지고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고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등 내 몸이 나에게 주는 감각을 신뢰하는 편이 더 믿을 만 하다.

좋아‘보여’가 아닌 내가 경험해 봤더니 ‘좋았어’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직접 경험해봐야 한다.

실제와 상상의 간극은 아주 클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시도해보는 행복의 경험에 누군가가 자꾸 태클을 건다고 해서 너무 쉽게 의기소침 해지지 말자. 자신의 길이 혹시 틀린 것일까봐 그도 불안해서 그러는 것이다.

내 선택을 믿고 내 몸이 주는 감각을 믿자. 그리고 주위에 나를 응원해주는 좋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자.

행복해 ‘보이는’ 것보다 ‘행복한’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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