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가스포어 megaspore Feb 23. 2023

입고 갈 옷이 이것 밖에 없다

5살 아들이 유치원에 가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옷에 쏟았다. 옷이 많이 젖긴 했지만 휴지로 다 닦아줬고 좀 지나면 마를 터였다.


아들은 울상이었다. 이거 어떡해 하면서 계속 걱정을 했다. 나는 그게 신경 쓸일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유치원 들어갈 때까지 젖은 옷을 움켜쥐며 계속 신경 쓰는 아들을 보며 난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생각도 안 날 일로 우리는 걱정하고 스트레스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세월이 지나 늙은 내가 지금의 나를 봤을 때 해줄 말도, 지금의 내가 할말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그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줄 알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했고, 지나고나 면 별거 아닌 일들로 안도하고 기뻐했었다.


별거 아닌 일로 스트레스 받고 속상해하는 지금의 나도 인정해주고, 또 미래의 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것이 사실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님을 꿰뚫어 본다면, 우리는 조금은 덜 날뛰 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지.


어제 엄마가 가게 화장실 문 열쇠 수리하는 일이 잘 안되서 열 받아서 소맥을 드셨다는 말씀 을 하셨다. 난 그것 역시 며칠 지나서 수리하면 될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엄마는 진심으로 열 받아 하셨다. 그리고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진짜 저 일 때문에 화가 나신걸까. 사실상 드러난 것은 화장실 열쇠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채워지지 않는 다른 더 큰 것 때문에 다른 이곳저곳이 속상하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가슴이 쿵 하고 흔들렸던 것 같다.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걸 먹어도, 여행을 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싶었던 나날들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으리만큼 가벼운 내 존재...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그토록 떠다녔나보다. 헤맸나보다.

적당히 무거워야 더이상 헤매지 않고 정착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적당한 책임감. 적당한 사명감. 주어진 것에 대한 적당한 수용. 체념. 그것으로 부터 오는 묘한 안정감.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은 나는 이것밖에 없다는, 나에겐 너밖에 없다는, 감사함. 소중함. 감사한 마음도 처음에는 체념과 같은 쓸쓸하고 초라해보이는 감정에서 비롯될 때도 있는 것 같다.


맘에 들지 않는 젖은 옷이지만 나는 이것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설 수 밖에 없다는 체념. 현실에 대한 수용. 한참 뒤에 오는 이래도 괜찮다는 묘한 안정감.


이대로도 괜찮다. 별볼일 없고 버젓하지 않은 이대로도 괜찮다. 나에게는 갈아입고 갈 옷이 없다. 나에게는 오직 겨우 이 정도의 남들이 알아볼까 부끄러운 옷밖에는 없지만 이것을 입고 세상에 나아가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겨우 이정도밖에 안되는 옷이지만 나에게는 이것밖에 없다는 어쩌면 초라해보이는 체념과 수용을 한 뒤에는 묘한 안정감이 생긴다.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사실 사람들이 그정도로 나를 신경쓰지는 않았구나. 내가 가진 걸로도 사람들을 웃게 할 수 있구나. 같이 살아갈 수 있구나. 란 걸 알게 되면 조금은 마음이 놓아진다.


늘 긴장했던 우리. 늘 무엇을 이루느라, 자신을 꾸미느라 조급했던 우리. 내가 가진 것으로 이 세상에 참여할 수 밖에 없다.


체념하는 과정은, 나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 수용이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나다운 방식으로 더 적극적으로 모르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