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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가스포어 megaspore Feb 24. 2023

씨바, 너 뭐야?

영화 <목격자>를 보았다.


살인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이 두려움을 이기고 결국은 살인자를 신고하고 살인자를 물리친다는 어쩌면 아주 뻔한(?)내용이다.


뻔한 내용에 비해 내내 쫄깃한 긴장감을 놓치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만하고 특히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주인공의 내면 변화이다.


수수방관하던 소극적이던 주인공이 내면의 갈등을 이겨내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결국은 옳은 선택을 한다. 그것이 자신을 막다른 곳에 몰지라도.


어쩌면 옳은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목격자인 주인공과 살인자는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데 그때 주인공은 살인자의 목을 조르며 이러한 대사를 한다.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씨바, 너 뭐야? 악마야?”


욕과 함께 나온 이 말을 할 때 자신을 찾아온 운명을 회피하기만 하던 주인공은 내면의 갈등을 이겨내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끝내 운명에 맞섰다. ‘씨바!’이라는 욕을 하며 말이다.


운명을 제대로 직면하려면 욕을 해야 한다는(?)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연히 (나말고) 아무도 없을테지만 여기서 욕이 가지는 의미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욕이 터져나왔을 때 드디어 주인공은 자신을 짓눌렀던 두려움을 튕겨냈다. 아니, 두렵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겨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절규이자 비겁했던 자신을 탈피하기 위한 자기해방의 욕이다.


우리는 제정신으로는 자신을 이기기 힘들다. 우리 모두는 유전자 보존 본능으로 안전을 추구한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 오늘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일을 만들려 죽도록 노력한다. 본인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철학자 강신주가 이런 말을 했다.


“번지점프대에 한번 서봐야 해요. 씨바, 나 왜 이렇게 비겁하지? 비겁하고 비겁하다 보면 결국 이런 자기 자신이 너무 싫어서 뛰게 돼요.”


이 번지점프대는 진짜 번지점프대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를 부르는 그 마음의 소리,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옳은 선택을 두려움 때문에 회피해왔던 비겁한 내 자신을 한번쯤은 이겨내고 뛰어버려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 과정은, 내면의 갈등을 이겨내는 그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절로 욕이 나온다.


하지만 그 길이 옳은 선택이기에.


내가 그 길을 선택함으로써 어떠한 결과를 맞이하든 그것이 옳기에,내면의 갈등을 이겨낼 힘이 나오는 것이다.


인생을 수수방관해왔던 우리,


언젠가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인간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비겁하고 비겁한 자신을 보고 또 보고 자신이 너무나 싫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내가 용기를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에야 인간은 변화를 한다.


그러니 나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나에게는 너무나 냉정하고 험한 세상이 어쩌면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세상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정도의 자극이 아니고서야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막다른 골목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준다. 내면에서 이것이 내 인생을 위한 옳은 선택이라고 계속 외치지만 두려움에 계속 회피해왔던 그것을 이제는 직면할 수 밖에 없다.


그 선택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내면의 부름을 외면하지만은 않게 될 것이다.


내 인생에서 나는 늘 수수방관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코 원치 않았던, 나를 찾아온 평범치 않았던(어쩌면 아주 평범했을)상황을 겪으며 나는 나도 그리 약하지만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 과정에서 조금은 더 강해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욕이 저절로(?)나왔다.


욜로(YOLO)라는 말이 유행인거 같다.


You Only Live Once.


한번밖에 살 수 없다는 너무 당연해서 희안한 그 사실. 그리고 이미 너무 많이 지나버렸다는 그 안타까운 사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았든 우리는 살아오면서 어떠한 경험을 했고 그것이 행복한 경험이든 불행의 경험이든 우리는 이미 그 세월을 겪었다.


객관적으로 행복했던 과거든 불행했던 과거든 우리는 이미 그 세월을 겪었다. 다시 돌이킬 수 없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경험을 나에게 도움이 되도록, 나의 자산이 되도록 만드는 일 뿐이다.


그것이 상처였다면, 우리는 상처 받은 사람들의 심정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방법은 없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경험 내에서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상처였다면,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받은 똑같은 상처를 타인에게 전하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다. 겪어봤으니 얼마나 아픈지 잘 알지 않은가.


우리가 겪은 모든 것을 아픔으로만 간직하면 우리의 지나간 세월이 너무 억울하다. 더이상 내 인생의 피해자로 살고 싶지 않다면 그 경험을 내 자산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어찌됐건 그 세월을 겪었고 돌이킬 수 없다면 그것을 상처가 아닌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숨기고 싶은, 나를 막다른 곳에 몰았던 그 과거조차도 어쩌면 우리를 위한 것이다.


뻔한 자기계발서식 결론은 짜증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으로 더 낫게 살아야 한다. 더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없겠지만 태어난 이상 ‘내가 이래서 태어났구나’라는 사명감이 자신을 진실로 숨쉬게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소명이 무엇인지는,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는 아마 우리 가슴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회피하는 삶이 아닌 직면하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그 뒤에 어떤 결과가 찾아오든, 그것이 결국은 옳은 선택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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