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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lan Gyeong Jan 25. 2020

뭐가 뭔지도 모르고 시간은 갔다

그림와 사진은 나의 갬성


  

     



  10년 간 아빠의 아내로, 오빠와 나를 키워주셨던 새엄마이자 첫 엄마께서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 심심해서 호기심에 엄마 옷장을 한 층 한 층 뒤지며 놀다가 우연히 아기 카드와 사진들을 발견하고는 나의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라 다른 곳에 남자아이 두 명을 두고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본능적으로 이 일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했다. 오빠와 내가 접어 드리는 빨간 카네이션은 매년 그녀의 가슴이 아닌 진열장에 전시되고 마는 것도 서운하긴 했지만 나 혼자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5학년쯤이었을까, 티브이에서는 연일 온 국민들이 줄지어 금을 내다 파는 모습을 보여주며 나라를 살리고자 하는 우리 국민들의 애국심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었다. 언젠가부터 식당을 하시던 엄마는 주방에서 손님이 남긴 소주를 몰래 병째 들이마셨다고 한다. 이후 수년간 지속된 알코올 중독이 우리 가족 모두를 시달리게 했고, 하루 밤은 술에 취해 식당 앞 길바닥에 누워 피를 토하기까지. 그녀는 이내 간암 진단을 받고 말린 꽃처럼 서서히, 그리고 곧 완전히 축 늘어졌다. 투병 4개월쯤 되자 돈 없어 가난한 아빠는 차라리 그분이 빨리 죽어서 남은 가족이라도 살게 해 줬으면 바라셨다고, 나중에 고백하셨다.      



  

     처음 맞이하는 인간의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라서 장례식에 어색하게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서있는데

 고모들이 와서 크게 울면서 얼싸안아 주더라. 그제야 나도 뜨겁고 굵은 첫울음을 터트린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며칠 뒤 친척들이 와서 엄마 옷장을 정리하고 집 뒤 공터에서 그것들을 태웠다고 했다. 

그때의 나는 중학교 1학년 여자 아이 었다.             



    아빠는 일을 해야 하고 오빠는 남자 애니까 내가 집안일을 도맡게 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당연히 여자인 내가 하는 것이지 하고 아빠를 또는 오빠를 원망하는 마음은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다. 먼저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가스레인지 위에 치키치키 밥솥으로 밥을 지었고 도시락 3개를 쌌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세탁기를 돌리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가장 먼저 집에 돌아와서 집을 누비면 매일매일 엄마 유령이 집을 거니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래도 뭐가 뭔지도 모르고 시간이 지났다.     

오늘날까지도 그러하지만 오빠와 아빠와 나는 서로 앞에서 슬픔을 드러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퍼해야 할지 그 방법을 잘 몰라서 서로 앞에서 드러내지 못했을 뿐, 자려고 누우면 언제든지 눈물이 줄줄 흘러 베개가 얼룩 젖었다. 다만, 우리는 각자 방에서 각자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매일 슬퍼했을 것이다.





     그때는 IMF 시절, 아빠가 우리에게 단 한 번도 힘들다고 내색하신 적은 없지만, 방학 때는 점심은 항상 라면만 먹었다. 장은 주로 아빠랑 나랑 둘이 보러 갔는데 아빠는 슈퍼마켓 들어가면서 오늘은 이 만 원 치만 사~ 아니면 삼만 원어치 사~ 하고는 다른 볼 일이 있다는 듯 항상 다른 데를 가서 서성거리면서 마트나 장을 둘러보셨다. 어린 나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아빠는 마누라 없는 처지가 남들에게 딱해 보일까 부끄러웠던 것 같다. 씩씩하게 혼자 마트를 돌며 어묵 사고 계란도 사고, 고등어도 사고 도시락 반찬거리로 비엔나소시지 같은 것들도 샀다. 최대한 저렴하고 양이 많은 것들로. 집에 돌아와 냉장고 정리를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도시락 쌀 때, 보기 좋고 통통한 반찬은 오빠 도시락, 아빠 도시락에 먼저 넣고 싸갈 찬이 없으면 곤란하진 나는 배추김치 뿌리를 깍두기처럼 보이게 해서 도시락 반찬통에 썰어 가기도 했다. 



              

 아빠와 오빠와 나.

 그 시대가 휩쓸고 간 상처를 저마다 조용히 끌어 앉고 견뎠다. 오빠와 나 모두 서른이 더 넘은 오늘날까지 우리는 그 날의, 그 집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너무 깊은 상처가 되는 날들이라 각자의 기억 속에서 마치 영상편집으로 교묘하게 잘라내서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정말 그런 날들이 없었던 것처럼.



어렸던 나는 죽음과 가난, 그리고 가부장주의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착한 마음으로 순종했다.

그리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시간은 지나갔겠지.        









시대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로 팔다리로 삼아 폭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또 시간은 간다.




가만 생각해본다.

지금, 오늘의 시대가 나를 팔다리 삼아 내두르는 폭력은 무엇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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