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9일
부끄러움은 어떻게 잊는 걸까.
근 한 달간 쓰지 못하던 가사를 이번 주에 다시 쓰기 시작했다. 매일 마감이 몰리다 보니 밤을 새우기 일쑤다. 사실 전적으로 마감 탓은 아니고 미루는 내 지분이 크지만. 지금도 내일 마감을 제쳐두고 이미 제출한 가사들을 보고 또 있다. (작사가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행위다. 냈으면 잊어야 한다.)
그러다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첫 줄부터 대박 맞춤법 실수! 데모곡의 영어 발음에 심취해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나. 사람이 이래서 밤에는 잠을 자고 낮에 활동해야 하는 것이다. 맞춤법 검사기 여러 번 돌렸는데 배신이다. 만감이 교차하면서도 그냥 오타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빼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비극은 이 곡이 Verse가 아니라 Chorus로 시작한다는 데 있다. Chorus는 반복된다. 고로 틀린 맞춤법도 반복된다는 뜻이다. 까꿍. 이 정도면 A&R에서도 오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실 것이다. 시안 제출하기 전에 맞춤법을 꼭 확인하라고, 내가 쓴 가사가 맞춤법이 틀린 채로 멜론 사이트에 올라가면 얼마나 쪽팔리겠냐고 강조하던 학원 선생님의 외침이 삼중협주곡처럼 처절하게 퍼졌다. 물론 하나의 시안이 실제 가사로 채택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내 틀린 맞춤법이 만천하에 공개될 가능성은 사실 몹시 낮다. 하지만 진정되지 않아. A&R 님은 보시잖아. 지옥의 나날. 두 시간째 이불을 차고 있다.
이런 종류의 부끄러움은 어떻게 잊는 걸까. 며칠 전 릴스에서 민음사 김민경 편집자님이 사사건건 아는 척하면서 가르치려고 드는 것보다, 사람은 착한데 맞춤법이 다 틀리는 쪽이 낫다고 하시는 걸 봤다. 깔깔 웃으며 공감해 놓고, 정작 내 일이 되자 작대기 하나 때문에 이렇게 일희일비하다니. (물론 작대기 하나도 중하지요. 세종대왕님 죄송합니다.)
맨 처음 줄이 아니라 중반부쯤에 틀렸으면 좀 덜 부끄러웠을까. 진지하게 고찰해 보았는데 그런 것 같다. 난 모든 것의 도입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이런 ‘만약에’를 가정하고 있는 것도 어이기 없다. 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걷잡을 수가 없다. 비장한 음악에 내레이션 깔리는 상상 따위를 말이다. ’ 그때 이 여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작은 맞춤법 실수 하나가 그녀의 인생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요.’
그래도 글을 쓰다 보니 흥분이 가라앉는 것 같다. 글쓰기엔 부끄러움을 잊는 효과도 있는 모양이야.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람은 안 돼
라는 미실의 대사가 자동완성 돼서 괴로운 밤이지만, 실수한 나를 칼로 베어버릴 미실은 선덕여왕 50화에서 별이 되었다. 나는 이제 유난 그만 떨고, 안전한 방구석에서 다시 가사를 쓰면 된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