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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Jul 11. 2017

19. 미성숙한 내가 면접관이 되면 생기는 일

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19

프로베이션을 통과하기 며칠 전, 초기 멤버들이 나와 동기를 따로 부르더니 해 준 이야기가 있다.

"두 분도 프로베이션에 통과하게 되면 면접에도 들어가고, 신규 입사자분들의 평가에 참여하실 수 있어요"

초조해하는 우리를 달래기 위해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은근슬쩍 미래 이야기를 흘리면서 프로베이션 통과를 암시하는 건가? 온 신경이 프로베이션 집중되어 있었던 나는 면접관이 될 수 있다는 말 저 멀리 흘려보냈다. 그건 마치 '열심히 일하다 보면 복이 온대'처럼 먼 이야기 같았달까.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두둥


놀랍게도 입사 3개월이 지나자마자 나와 동기는 리얼리 면접관으로 투입되었다. 우리 회사의 1차 면접은 3명의 면접관이 들어가는데 주로 HR 매니저와 해당 팀원 2인이 참석하는 구성이다. 나는 콘텐츠 팀 면접에, 동기는 커뮤니티 팀 면접에 들어가게 되었다. 취준생 시절, 동기는 언젠가 본인도 저 면접관 자리에 앉게 되기를 고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조차 이건 너무 속히 이루어진 감이 있다며 당황해했다. 사실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모두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타이밍이 좋았다. '면접관 TO가 났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콘텐츠 팀과 커뮤니티 팀 모두 우리 포함 겨우 두 명씩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그 뒤로는 인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직원 대부분은 면접에 참하지 않았다.  


여타 일반 기업들이 그렇듯 스타트업 채용 전형 역시 회사마다 천차만별이다. 우리 회사는 그중에서도 까다로운 편에 속했다. 면접관도 지치고 지원자도 지치는 이 환상의 프로세스는 최소 한 달 이상 소요되었다.


일단 서류 접수를 받는다. 서류가 들어오면 팀원들이 모두 그 서류를 읽어본다. 이때 팀원 중 단 한 명이라도 지원자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하면 지원자에게 역량평가서를 작성해달라는 메일을 보낸다. 역량 평가서 문항은 팀마다 다른데 최대한 지원자의 스킬셋과 강점이 현재 회사와 포지션에 적합한지 알아보는 절차다. 아래는 내가 받았던 질문 중 하나.

<컨텐츠 분야>
1. 내가 컨텐츠 스페셜리스트라고 자부할 수 있는 관심사 분야는 무엇입니까? 주로 어떤 매체, 플랫폼, 또는 커뮤니티를 통해 이 분야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계신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또한 이 관심사에서 가장 파괴력 있는 콘텐츠는 어떤 종류의 콘텐츠라고 생각하시는지, 예시와 함께 설명해주십시오.

역량 평가서가 도착하면 다들 읽어보고 면접을 볼지 말지 의논한다. 이때까지는 팀원 중 한 명이라도 진행을 원할 경우 그 의견에 따르는 편이다. 하지만 면접을 보고 나면 모든 의사결정은 다수결로 바뀐다. 지원자를 보내고 나면 면접관들끼리 먼저 OX로 동시에 의견을 표현하고 각자 왜 O 또는 X를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긴 논의 끝에 대표님 면접을 보게 할 지, 추가 면접을 볼지 결정한다. 대표님 면접이 또 아주 만만치 않다. 덕분에 실제로 통과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매번 낮은 입사율을 보이는 것이 현실...사람 좀 뽑아주세요.  


그러던 중 나는 엉뚱하게도 두 번째 면접장에서 일생일대의 전환점맞이했다.


당시 동기는 과중한 업무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녀가 맡고 있던 시사 뉴스 파트를 누군가에게 덜어줄 수 있었으면 했다. 게다가 회사에는 새로운 남성패션 담당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날 내 눈앞에 앉아 있는 남성 지원자는 그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적격자로 보였다. 면접 초반부터 나는 무조건 이 사람을 뽑자고 말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때 그가 해선 안 될 그 말을 하고야 만 것이다.

"면접관님들의 꿈은 무엇인가요?"

나는 그 면접장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청춘영화에나 나올법한 지원자의 질문에 이어진 HR 매니저의 답변은 내 마음에 불을 지르고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만화 원피스 아시나요?
전 원피스를 참 좋아하는데요.
루피가 해적왕이 되기 위해서 동료를..."


그렇다. 스타트업 뉴비들의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 원피스^ㅡ^


솔직히 이 짤 만든 사람 내 인생 책임져야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스무 살이 되자 나는 많이 외로워했다. 수능 아래 하나였던 친구들과 모든 걸 함께 나누던 시절끝났다. 낯선 곳에서 강의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웃음 속에서도 묘한 벽을 느껴야 한다. 학창시절 나는 수업시간이면 매일 뒤에서 자는 아이였는데 이제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아서 교수님 A 주세요라는 눈빛을 날리게 되었다. 나는 사회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치열한 눈치싸움을 했고 기력이 소진되었을 때쯤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위안을 얻었다. 그때쯤 신화를 엄청나게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면 누군가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무언가를 할 일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어느새 홀로 선 어른이 되었는데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어른이었던 저 오빠들은 여전히 여섯이서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연극영화과에 가면 그럴 기회가 올까? 피디가 되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팀에 대한 로망이 컸던 나는 이십 대 내내 무언가 빈 느낌으로 지냈다.


그래서 나는 더 쉽게 바보가 되었던 것 같다.

'나도 써니호를 타고 모험을 하겠어.'
하지만 현실은 이렇습니다 하핳핳ㅎㅎ그래도 행복했닿ㅎㅎㅎㅎㅎㅎ

원피스를 부르짖은 HR 매니저는 회사의 초기 멤버이자 향후 내가 옮겨갈 UA팀의 리더이기도 했다. 여차여차해서  옮기고 내가 어떻게 루피의 노예로 살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내 평생 최고의 팀을 만났서 많이 배웠고, 힘들어도 행복했으며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니까.


나는 UA팀에 가서도 많은 면접자를 만났다. 나 역시 언론고시생 시절 면접에서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수두룩했기 때문에 면접자에게 늘 친절한 얼굴을 했. 하지만 그들을 엘레베이터 앞에서 배웅하고 나면 나는 가면을 벗고 더할 나위 없이 오만해졌다. 함부로 그들의 잠재능력을 속단하고 결론지어 버렸다. 나는 신이 아니었는데 한 인간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면접관이 되기엔 아직 미성숙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꿈이라는 단어에 지원자보다 더 사정없이 흔들리고, 알량한 권력에 취해서 우쭐해지고.


면접관이 된다는 것. 그건 어떤 책임과 의미가 따라오는 것일까. 아마 한동안은 면접관이 될 일이 없을 테 살면서 차차 생각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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