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동료에게서 처음으로 책 선물을 받았다. 과연 어떤 책일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받아 들었는데 책 제목이 ‘약간의 거리를 둔다’였다. 그 당시 동료는 나의 바로 옆자리였는데 말이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라니.. 자꾸 책 앞표지를 만지작거리게 하는 제목이었다.
평소 그는 내가 우리 팀에서 제일 대화를 많이 나누고 또래인 터라 편하면서도 가끔은 한참 선배처럼 느껴져 존경심이 툭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그의 머릿속엔 항상 수많은 경우의 수들이 나열되어 있고, 그에 대한 대안까지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맡기더라도 척척 해내는 모습이 부러울 정도로 믿음직스럽고 명쾌했다. 왠지 그가 나에게 이 책을 건네준 이유도 있을 것 같아 궁금해졌다. 덩달아 그가 읽었던 책들까지도 알고 싶어 본인 삶에 영향을 끼친 인생 책이 있었는지 대뜸 물었다.
- 인터뷰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 혹은 이 질문에 어울릴 것 같은 사람
- 질문: 당신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인가요?
인생에 영향을 끼친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인가요
“수학의 정석.”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이토록 간단명료한데 슬픈 대답이 있을까 싶던 찰나, 답변이 연이어 날아왔다. “대학교 땐 그 시절에 만나던 애인의 영향으로 일본 소설을 읽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이사카 코타로, 에쿠니 가오리. 이렇게 세 작가의 책은 지금도 신작 나오면 챙겨서 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관 자체를 판타지적으로 구성하는 경우가 있어서 흥미롭기도 한데 주인공이나 작가의 일상적인 면이 드러나는 게 더 재밌다고 했다. 그리고 이사카 코타로는 글이 위트 있고 따뜻해서 읽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그가 범죄 추리소설 같은 걸 써도 결말은 따스울 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마지막으로 에쿠니 가오리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사랑밖에 없는 것처럼 살다가 스스로의 고독감에 목이 메어 죽을 것 같은, 그런 주인공들이 나온다고 했다. 현실적인 거리감이 드는데 감정적인 동질감이 느껴져 좋아한다고.
인생 책을 물었더니 수학의 정석에서부터 여러 명의 작가가 쓴 소설 그리고 다양한 해석들을 쏟아내다니. 또 한 번의 존경심이 뿜어져 나오는 걸 겨우 주워 담고 혹시 나에게 준 책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는 단번에 “앗, 수영하는 언니 있는 책”이라고 답했다. 이번엔 책 이름과 건네준 의미의 연관성에 대해 묻자, 그 조그만 채팅창에 “아니다”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적어 보내던지 매사 침착한 그도 당황한 듯했다. 그는 내게 선물한 책이 결코 누군가에 거리를 두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삶의 경험에 대한 에세이노라 주장했다.
사실 고백하자면, 이 대화를 나누고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 책을 다 읽었는데 인상 깊었던 구절보다 그와 나눈 대화가 더 생생하게 남았다. 좋았던 페이지는 따로 접어두기도 했는데 말이다. 결국 책보다는 사람과 함께 나눈 말이 더 오롯하게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요새 주중엔 글을 읽고, 일요일에는 글쓰기 수업이 있는 망원동엘 간다. 작가님이 준비하신 수업 자료를 보다가 중요하거나 기억해두면 좋을 부분은 가져온 노트에 한 자 한 자 적고 있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다음 주가 벌써 마지막 수업인데 한 번도 그 노트를 다시 살펴본 적이 없다. 애써 필기한 내용이 머릿속에 남지 않을 일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다. 그럼 무엇이 남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문득 지난 일요일 생각이 났다. 작가님이 예고하길, 이날은 글을 쓰지 않고 여러 글을 읽고서 이야기를 나눌 거라고 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수업 당일 프린터가 고장 났고 이내 우리는 작업실 근처에서 사 온 음식들을 펼쳐 놓으며 자체 휴강 파티를 시작했다. 한낮에 만나 캄캄한 밤이 되도록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나누었다. 활자 한 자 없었지만 헤어지는 순간에도 대화는 끊길 줄 몰랐다.
아마도 이 수업이 끝나면, 예시로 읽었던 수 편의 좋은 글보다 결국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가 더 오래 남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