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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ㅇㅈ Oct 31. 2021

ISFJ가 할로윈의 제왕 ‘직쏘’ 분장한 사연

아일랜드에서 할로윈 제대로 즐기기

10월 31일은 할로윈이다. 한국에서 할로윈은 모두가 즐기는 기념일이 아니지만, 아일랜드에선 일주일 홀리데이를 줄 만큼 큰 행사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몇 주 전부터 코스튬을 사고 집과 가게를 할로윈 장식들로 으스스하게 꾸민다.


그리고 아일랜드에 와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하나 더. 할로윈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 와서까지 할로윈을 무의미하게 보내면 아쉬울 것 같아 지나치지 않기로 했다. 아마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즐기는 할로윈이 될 테니까.


마트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코스튬과 할로윈 장식품들


그래서 시작한 할로윈 프로젝트. 이름하여 JIGSAW X JOMBIE PROJECT. 어디 한번 제대로 즐겨보라는 신의 계시인지 할로윈을 앞두고 친구 Y를 알게 되었다. 아일랜드에 와서 처음 만난 동갑내기에다가 통하는 면도 많고,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것 같은 편하고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Y와 시작한 직쏘X좀비 프로젝트. 대부분 저녁부터 파티가 시작이라 Y가 일이 끝나면 우리 집에 오고 같이 준비를 해서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난 이 프로젝트에서 직쏘를 맡아 일주일 전부터 따라해볼 만한 이미지를 찾아보며 피부에 바를 하얗고 붉은 색조 화장품을 사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 재킷과 빨간 리본까지 사두고는 흐뭇했는데 화룡점정은 빨간 렌즈였다. 화장대 위에 올려져 있는 렌즈를 보면서 내가 이런 렌즈를 끼는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우리 프로젝트의 레퍼런스가 되어준 어마무시한 이미지들.


그렇게 D-day가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홈스테이와 쉐어하우스를 포함해서 내 집에 누군가 놀러 온 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앞두고 배를 든든하게 채워야 할 것 같아 Y 앞에 아껴 두었던 사리곰탕면과 햇반 그리고 김치를 꺼냈다. 그렇게 둘이 사이좋게 나눠먹고선 본격적으로 분장을 시작했다. 하얀 색조 화장품을 열심히 펴 바르다 문득 Y의 모습이 궁금해 옆을 쳐다봤는데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아까까지 밥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던 Y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를 곧 잡아먹을 것 같은 잿빛 피부에 피를 흘리는 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점점 분장에 박차를 가할수록 우린 제법 그럴싸한 직쏘와 좀비가 되어갔고, 미리 사둔 컬러 렌즈까지 끼고 나니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 좀비를 맡은 Y는 눈동자가 좁쌀만 한 흰자 가득한 렌즈를 꼈는데 얼핏 봐도 섬뜩했다. 아직 피 묻은 셔츠로 갈아입기 전이었는데도 그대로 나가도 충분할 것 같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직쏘와 좀비가 출격했다. 어제만 해도 길거리에서 코스튬 입은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버스 타는 정류장에도, 버스 안에도 바글바글했다. 출발하면서부터 넘치는 구경거리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흥미로운 게임에 내가 참가자로 놓인 기분이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하드록카페였다. 지하는 펍이고 1층은 카페, 2층은 식당으로 되어 있는 곳이었는데 식사를 하고 온 뒤라 칵테일을 마시기로 해서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와중에 한 외국인 할머님이 우리에게 오셔서는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렇게 얼떨떨한 기분으로 사진을 찍고 자리를 잡았는데 눈앞에 앉은 Y를 보니 웃음이 자꾸 났다.

 

주문한 칵테일이 우리 테이블에 놓였고 우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서로 깔깔댔다. 펍에 와서 칵테일을 마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피 흘리는 좀비가 차분히 빨대로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걸 보자니 웃음이 터져버린 것이다. 친구도 같이 킥킥대더니 직쏘가 자전거는 어디에 두고 칵테일을 마시러 왔냐고 물었다.


처음엔 시내 한복판에서 할로윈을 즐기는 건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 템블바 근처는 최대한 피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우리가 돌아다닌 곳 모두 다 템블바였다. 지도에서 다닌 펍을 골라내 보니 템블바만 골라 다닌 것처럼 선이 죽 이어졌다. 확실히 시내 중심가를 돌아다닌 덕분에 코스튬 구경도 많이 하고 여러 번 사진 촬영 부탁에도 응했다.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누군가의 추억이 된다는 게 참 낯설면서 즐거운 일이었다. 그게 한국도 아니고 아일랜드에서, 그리고 외국인에게 말이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즐겨놓고 친구들 사진만 올리기..


마지막으로 간 펍에서는 검은 발레복을 입고 속눈썹 한 올 한 올까지 근사한 블랙스완도 보고, 마리오에서부터 드라큘라, 스머프, 가면 쓴 사람 등등 많이 봤는데 정작 직쏘를 분장한 사람은 없어서 괜히 뿌듯했다. 한 외국인은 장난스럽게 자전거는 어디 있냐며 길가는 나를 세워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Y한테는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이 아름답다며 찬사를 보냈다.

 

요새 흔히 말하는 MBTI에서 I 시작하는 내가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에너지를 나누었다는  두고두고 기억날  같다. 더군다나 평소 공포영화라면 질색을 하던 내가 직쏘 분장을 하고 피가 흘리는 좀비를 앞에 두고 킥킥대고 있다니. 한국에선 절대 상상   일이었다. 갑자기  하던 것을 하면 죽는다던데  우스갯소리는 허무하게도 재밌는 이야기로 끝났다. 가끔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이라 정의하기 어려운데 나름의 일탈도 즐길  아는 사람이었다.  번쯤은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루를 즐겨도 되었다.  속에서 색다른 나를 발견해 좋은 모아서  나은 내가 될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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