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집주인 아저씨 안토니가 벽지를 도배해 주러 집에 오기로 했다. 사실 도배라고 하기 뭐한 게 벽지 윗부분이 조금 떨어졌을 뿐이다. 처음엔 스카치테이프로 응급 처치해 봤는데 10초 만에 벽지와 벽은 또다시 이별했고, 그대로 두자니 벽지 뒤로 보이는 세월의 흔적들이 내 맘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안토니에게 상황을 문자로 전했고, 주말에 집을 와주기로 했다. 그렇게 일요일이 됐고, 2시 정도였을까 소리 소문도 없이 그가 찾아왔다. 안토니는 영화 속에서 볼 법한 정 많은 이웃 아저씨 인상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어디가 떨어졌냐며 소매를 걷어 부쳤다.
본격적으로 풀칠하기에 도입한 그의 옆에서 난 고작 휴지를 가져다주고, 끈적한 물풀이 묻지 않도록 커튼을 잡아주는 등 거들었다. 새삼 이곳까지 와서 마음씨 좋은 집주인을 만난 것 같아 좋았다. 먼 타지에 혼자 살면서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이런 우연하고 좋은 인연들도 한몫할 거다. 안토니는 이곳으로부터 4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산다고 했다. 아마 벽지 때문에 여길 또 오고 싶지는 않겠지 싶으면서도 주말에 이렇게 시간 내서까지 손봐주다니 고마웠다.
그러다 문득 그가 아이리쉬인지 궁금해졌다. 아일랜드에 와서 홈스테이 가족과 지낸 뒤로는 생각보다 아이리쉬를 만나기 어려웠다. 더블린이 수도지만 아이리쉬보다 나처럼 영어 공부를 하러 오거나 일을 하러 온 외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아이리쉬는 더블린보다 한적한 외곽에 더 많이 산다고 했다. 그리고 외국인들이 아시안을 구별하기 어려워하듯, 나 또한 안토니가 아이리쉬인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아이리쉬 발음이 알아듣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와의 대화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안토니에게 아이리쉬인 지 물으며 "보통 아이리쉬와 이야기하면 알아듣기 어렵다더라"라고 덧붙였다. 돌아온 대답은 '그렇다'였고, "내 말은 알아들을 수 있겠냐" 웃으며 되물었다. 역시 사람마다 다른 듯했다. 생각해보니 홈 맘이었던 제럴딘도 발음이 깨끗한 편이었고, 내가 아일랜드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최대한 천천히 쉽게 말해준 덕분에 어렵지 않았었다. 그가 덧붙이길, 더블린이 제1 도시고 코크, 골웨이 등 다 다른 억양을 가지고 있는데 코크는 본인한테도 어렵다고 했다. 아마 이건 한국에서도 각 지역 사람들이 만났을 때와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고유한 억양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지역 사람들은 알아듣기 어려울 수밖에.
어느덧 도배를 마친 그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며 배웅했고, 저녁 늦게 룸 메이트인 프리아와 프리다가 도배는 잘했냐며 내 방으로 모였다. 그런데, 프리아가 내 방을 둘러보더니 흠칫 놀라며 물었다.
"너 이불은 어딨어? 시트는?"
다음 주면 부모님께서 택배로 부쳐주실 거고, 이케아에서 산 담요를 가리키며 더 추우면 수면바지를 하나 더 입으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둘은 갑자기 나만 모르는 작전을 시작한 것처럼 속닥대더니, 각자의 방으로 가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내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둘이서 챡-챡- 하고 끝내버렸는데 둘이 다시 내 옆으로 와서야 시야에 들어온 건 꽃무늬 시트와 그 위에 놓인 베이지빛 이불이었다.
프리아와 프리다의 방을 들어가서 둘러본 적은 없었지만 왠지 지금 내 침대와 비슷할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고맙다며 방 한가운데 놓인 목베개를 "이건 내 베개야"하고 장난스럽게 말했더니 둘이 또 나가서 작전 두 번째를 실행했다. 프리다는 새 베개라고, 프리아는 남은 커버라며 베개까지 챡챡 만들어주고 간 것.
아직 언어부터 많은 것들이 서툴고 어색한 건 분명하지만 내 곁의 사람들이 나를 조금씩 이 땅에 정을 붙이도록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