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ㅁㅇㅈ Jan 30. 2022

아일랜드 쉐어하우스, 새살림 위해 이케아에 가다

끝은 결국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

아일랜드에 온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이런 날 축하 파티라도 해야 하는데 홈스테이는 끝이 났고, 쉐어하우스로 이사하고서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이었다. 집주인은 다른 곳에 살고, 나 포함 4명이 사는데 모두 직장인이라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 슬픔보다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할 때 공허한 마음이 더 크다는 걸 느끼는 나날이었다. 더군다나 내 체력 또한 바닥나 있었다. 집을 구하고선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낼 거라 기대했는데 그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선 이곳엔 없는 게 너무 많았다. 방 한편에 침대와 작은 소파만 덩그러니 놓여있어서 이불이 필요했는데 내겐 이불이 없었다. 게다가 집에서 제일 바깥쪽에 있는 방이라 그런지 외풍마저 들어서 밤새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해야 했다. 새벽에 너무 추운 나머지, 잠결에 일어나서 가디건을 하나 더 입고, 뽀송한 수면바지까지 챙겨 입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어젯밤의 불청객은 따로 있었다.


다시 잠들려는 와중에, 저 멀리 천장 위 까만 무언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잠이 덜 깬 와중에도 자세히 보려고 한참 쳐다봤는데, 흐리게 보였던 시야가 서서히 초점이 맞춰지더니 이내 머릿속에 ‘거미’라는 두 글자가 입력되었다. 소리 없는 절규였다. 몰랐다면 모를까 내 방에 거미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냥 밤을 새울까 아님 두루마리 휴지를 통째로 던져볼까 하는 마음에 화장대로 다가갔는데 내 평생 이렇게 피곤한 모습은 처음 봤다. 무시무시한 추위와 싸운 걸 증명이라도 하듯, 하루 만에 수척해진 얼굴과 눈 아래 까만 다크서클이 거미와의 싸움을 이미 포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침 일찍 스쿨도 가야 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이만 체념하고 취침하는 게 나아 보였다. 슬프고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떴는데 아뿔싸, 해가 중천이었다. 지금 출발해도 수업은 이미 너무 늦은 것 같고, 내 몸도 쉽사리 움직여주질 않았다. 눈앞에는 아직 다 풀지 못한 이삿짐들이 펼쳐져 있었고, 뷰잉 첫날 넓게만 보였던 내 방이 황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전 홈스테이는 가정집이다 보니 한국에서 가져온 짐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지만, 쉐어하우스는 함께 살면서도 개인의 살림들로 각자의 공간을 채워야 했다.


당장 요리해 먹을 냄비와 물 한 잔 마실 수 있는 컵조차 없었고, 한국에서 부쳐줄 이불을 받기 전까지는 담요라도 있어야 기나긴 밤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난밤 나를 기절하게 만든 거미와 거미줄을 모조리 없애버릴 먼지떨이개까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내 방을 방답게 가꾸고, 짐 정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케아(IKEA)를 가기로 했다(아이리쉬들은 '아이케아'라고 읽더라). 서둘러 늦은 아침을 먹으러 1층 주방으로 내려갔더니, 이사 첫날 만난 프리아가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


지난밤 사건을 이야기하고는 이케아를 갈 거라고 말하니까 프리아가 시티에서 이케아로 가는 버스 번호를 말해주었다. 머릿속은 버스 번호를, 입 속은 차디찬 우유에 말은 시리얼을 부지런히 채우고 있었다. 밖에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추운 화장실에서 후다닥 씻고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주방 식탁에 웬 쪽지가 올려져 있었다. 프리아가 시티까지 가는 버스랑 시티에서 이케아가는 버스를 적어서 올려놓은 것이었다.



어젯밤부터 얼어붙었던 내 몸과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 프리아 덕분에 이케아는 수월하게 도착했고, 노란 쇼핑가방을 들고서 본격적으로 살 물건을 담을 차례였다. 매장 입구엔 쇼핑리스트를 적을 수 있는 메모지와 나무연필이 놓여 있었는데 사려는 제품과 고유 넘버, 복도 번호 등을 기록해 두면 나중에 셀프 코너(물건을 모두 모아놓은 큰 창고 같은 곳)에서 물건을 가져오기 편했다. 물건을 보고 바로 담을 수도 있지만, 재고가 없으면 셀프 코너에서 찾아 가져와야 해서 쇼핑리스트와 연필은 이곳의 필수템이었다.



집을 채우는 제품들로 가득 찬 곳에서 나 홀로 장을 보려니 약간 쓸쓸하기도 했지만, 인테리어 하나하나가 멋지고 좋아서 눈과 마음이 금세 즐거워졌다. 내 방도 저렇게 근사하게 꾸미고 싶은 욕구가 활활 타올랐는데 아일랜드에 와서 생긴 버릇이 있었다. 당장 꼭 필요한 생필품이 아니라면 '이거 한국에 가져갈 거야?' 스스로 물어보는 것. 그리고 '아니'라는 대답이라면 가차 없이 사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은 꼭 필요한 것만 사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함께 간 이가 없어도 씩씩하게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을 때마다 뿌듯하기도 하고, 내 살림으로 꾸릴 생각에 신나기도 했다. 반나절 쇼핑 끝에 집으로 돌아와 사 온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서 필요한 곳에 놓아두고, 화장대 의자를 꺼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시련이 있었으니. 간단히 손으로 만들 수 있어 보였던 의자는 드라이버와 공구들이 꼭 필요한 조립식 의자였다.



좌절도 잠시, 집 뷰잉 할 때 집주인 아저씨가 창고라고 했던 곳이 번뜩 떠올라 후다닥 내려가 보니 다행히 드라이버 도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어찌어찌 뚝딱뚝딱 조립해보았는데, 겉보기엔 예쁘고 좋아 보이지만 사실 나사랑 맞는 도구가 하나도 없어서 앉을 수 있게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완성했다.



내 집을 구하고 나면 끝인 줄만 알았는데, 새로운 시작이었다. 천장부터 방을 구석구석 먼지 없이 쓸었으니 거미의 '거'자도 나오지 않길 기도하며 다시 첫걸음을 떼어본다. 오늘은 담요도 있으니 따뜻한 밤이길 바라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아일랜드에서 내 공간을 마련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