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뮤지컬 원작 읽기 1

by 고드윈

어른이 되어 키다리 아저씨를 다시 읽고서 조 마치나 앤 셜리에 비해 제루샤 애보트가 조금 평가절하된 캐릭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2017년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를 보지 않았다면 나 역시 제루샤 애보트를 신데렐라 같은 캐릭터로 오해하며 살았을지 모른다.

제루샤가 앤이나 조에 비해 폄하되는 이유는 아마도 후원자였던 저비스와의 결혼 때문일 것 같다.

요즘처럼 끔찍한 사건이 많은 시기에 후원자와 피후원자 간의 연애는 도무지 로맨스처럼 안 보이긴 하지만 키다리 아저씨의 주요 스토리는 결코 두 사람의 로맨스가 다는 아니다.


소설이 처음 나왔던 1910년대를 생각해보면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를 쓰면서 로맨스를 배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키다리 아저씨는 로맨스 소재를 빌려와서 무겁지 않게 계급 문제와 여성 인권 문제를 이야기한다.


제루샤가 장학금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에세이“우울한 수요일(뮤지컬에서는 우울한 월요일로 나온다)”은 고아원 원생의 입장에서 바라본 후원자에 대한 솔직한 마음이다.

저비스를 포함한 후원자들은 한 달에 한 번 고아원을 방문해 시혜적인 태도로 원생들을 한껏 가여워한 뒤에 그들의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간다. 원생들은 매달 방문하는 후원자들을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피후원자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증명해야 했다.

요즘도 종종 SNS나 분란 만들기 좋아하는 언론에서 기초수급을 받는 사람들이 수급자로서의 의무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글을 올릴 때가 있다. 정부로부터 복지혜택을 받는 사람의 소비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사람도 있다. 어떤 특정 그룹의 사람들은 대중이 바라는 대상으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도 있다.


제루샤는 어느 일요일 한 주교의 설교에 분개하며 편지를 쓰기도 했다. 주교는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약속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구절이라면서, 사람들이 늘 자비심을 베풀 수 있도록 가난한 자들이 존재하는 거라는 발언을 한다. 제루샤는 가난한 자들을 마치 가축으로 여기는 말이라며 비난했고, 자신이 교육을 받아 교양인이 되지 않았다면 주교에게 달려가 따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소설 곳곳에는 진 웹스터가 깨알같이 그려놓은 사회비판적 장치가 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저비스도 처음에는 남학생에게만 장학금을 지급한 “girl hater”였고, 제루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액을 보내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게 아르바이트나 장학금 신청조차 반대했다. 물론 그의 반대와 상관없이 제루샤는 자신의 뜻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장학금을 받는다.


제루샤의 가장 친한 친구인 샐리는 학생대표 선거에 나가기도 하고 사회복지 사업에도 관심이 많은 인물로 나중에 키다리 아저씨 속편의 주인공(편지 발신자)이 된다. 아마도 제루샤는 샐리의 학생대표 운동 등을 통해 여성의 정치 참여 문제를 고민해보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1910년은 미국의 대부분의 주에서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참정권 운동에 대해서도 남성에게 선택되지 못 한 못생긴 여자들의 주장으로 취급했다. 100년이 지난 현재 페미니스트들에게 달리는 수많은 악플과 참 많이 닮아있다.


제루샤는 여성의 선거권에 찬성하는 내용의 편지를 무려 나이 많은 남자 후원자(충분한 기득권 계급)에게 보낸다. 그리고 훌륭한 숙녀나 귀부인이 되겠다는 말 대신 훌륭한 시민이 되겠다고 한다. 덧붙여서 여성도 과연 시민이 맞는지 물어본다.

출판 시기를 생각하면 이런 발언을 하는 여자 주인공의 존재 자체가 대단히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편이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것은 그만큼 제루샤의 편지가 유쾌하고 흥미롭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성의 입장에서도 어쨌든 후원자가 남성이고 그 남성과 결혼한다는 결말이니 별로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어떤 설정은 독자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키다리 아저씨에서는 후원자와 피후원자 간의 결혼이 그렇고, 유머 코드로 사용한 중국인 이야기가 그렇다. 뮤지컬이나 연극은 2차 창작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각색이 허용되고 그것이 시대의 가치를 반영한다면 오히려 관객의 환영을 받는다. 원작을 다시 읽고서 공연계가 이런 관객의 변화에 조금 더 빠르게 대응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