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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본향을 걷다
전주 한옥마을 취재기
by
The reader
Mar 16. 2020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도시의 관문부터
예사롭지 않은 곳.
전라북도 전주는
한 해 천만 관광객을 유치하며
관광 도시로 급성장한 도시이다.
세계적인 여행 안내서
로니 플래닛 역시
당장 가봐야 할
아시아의 3대 도시로 꼽은 전주.
일등공신은
단연 한옥마을
이
다.
한옥촌에 들어서면 800여 채의 기와가
파도인 양 능선을 펼쳐낸다.
조선왕조의 뿌리인 태조의 본향이며
후백제의 도읍이기도
했던 전주.
두 왕조를 품었던 도시는
호남제일문의 위용에서부터
확실히 한국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경기전, 전동성당, 오목대, 이목대 등의
역사 공간이 기다리고 있어
더욱 고귀하게 여겨진다.
유년시절의 추억 가득한 도시이기에
내게도 특별하다.
오랜만에 찾은 한옥마을 일대에서
오늘 나는
조선의 역사를 더듬어보기로 한다.
[한옥마을 한복데이 축제]
전주 한옥마을 일대는
연중 다양한 먹을거리와
한복 곱게 차려입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오래전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돼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던 한옥집들은
빈민촌을 떠올릴 만큼 노후화돼
어린 나의 눈에도 난감한 형색이었다.
개발이 불가능한 곳이다 보니 집값은 하락했고,
긴 세월 토박이로 마을을 지켜온 이들조차 하나둘씩 떠나갔다.
이사를 감행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들만
낡은 한옥을 지키며 살아갔다.
90년대 중반
고향을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한옥마을의 사정은 그러했었다.
이후 개발과 보존 사이
숱한 갈등이 이어졌다.
결국 공론을 거쳐
대대적인 정비에 들어갔고
지금의 관광구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전주 한옥마을 곳곳엔
조선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한옥마을이 조성된 역사부터 남다르다.
전주시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한
전주 한옥마을의 역사를 참고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주로 들어온 일본인 상인들은 당시 서문 밖에 거주했다...
서문 밖은
지금의 전주 천변 다가동 일대이다... 신분제도가 남아있던 그 시절, 성곽은 신분에 따라 거주지를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성 밖은 천민과 상인들의 구역이었을 것이다. 조선으로 몰려든 일본인 상인들 역시
성안으로 진출할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곳곳의 성곽이 철거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들은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구실을 잡게 된다.
한옥마을의 조성은
당시 상황에 대한 반발이었다.
『.... 상권을 빼앗긴 주민들은 1930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반발해
교동과 풍남문 일대에 한옥촌을 조성한다.』
강제된 근대화에 대한 침묵의 저항.
전주 한옥마을은 그 조성된 배경에
이렇게 마지막을 향해가던
조선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
시대를 더 거스르면
조선 창업의 기운 또한 마주 보게 되는데...
한옥마을 공예품 전시관 뒤
우뚝 솟아있는 언덕길을 오르면
다듬은 양 평평한 정상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세워진 정자와 비석은 물론
이 언덕 전체를 통칭해 '오목대'라 칭한다.
한옥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권이기에
많은 이들이 이 풍광을 담기 위해
오목대 정상을 찾곤 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옥들의 팔작지붕 능선은
가히
장관이다.
[오목대에서 내려다본 팔작지붕 능선]
조선 개국을 눈앞에 두었던 고려 말.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
개경으로 향하던 이성계는
이곳에서 자축 연회를 벌인다.
그리고
한 고조의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부르며
처음으로 역성혁명의 뜻을 드러낸다.
대풍가의 대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풍운 속을 일어섰다.
위세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니
모두 수그려 우러러 맞네"
이성계는 조선 개국 이후
오목대에 정자를 지어 기념하게 하는데
그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여기엔 고종의 친필로 새겨진
비문이 하나 있다.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 이란 의미이다.
조선왕조의 뿌리라 할 전주에서
몰락해 가는 시대를 재건하고자 했을
고종의 의지였으리라.
오목대에서 육교 하나만 건너면
이목대,라는
곳이 나온다.
이성계의 5대 조인 목조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이다.
그 유명한 '용비어천가'속
인물
중 하나이다.
이곳에도 고종의 친필 석비가 세워져 있다.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
전주 이 씨 시조인 이한부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까지
이곳에 터전을 이루며 살았었음을 명시한 것이다.
왕가의 뿌리를 신성시했던
조선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이목대 인근은
최근 ‘자만 벽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마을 전체가 거대 미술관이요,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작품이 된다.
[ 자만마을 벽화 골목 ]
자만 마을은
한국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겨난 달동네였다.
2012년부터
마을 주민들과 청년 예술가들이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가난의 상징이었던 동네가
도시 명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마을의 벽화 골목을 걷다 보면
비석 하나를 더 만나게 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워낙 작은 비석이기에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이 비석은
이 마을이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확인시켜 주는 금표이다.
금표란
해당 지역의 벌목이나 채석 등을 금지하는 경계석이다.
지금은 관광객으로 북적이지만
과거엔 일반인의 출입조차 통제했던
왕가의 신성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왕가의 성지에서 달동네로,
이제는 관광명소로 거듭난
자만동의 상전벽해
.
먼 훗날
이곳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
경기전
/
보검이도
다녀간 인기 사극 촬영지]
조선의 왕들은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를
각별하게 여겼을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창건한 경기전.
'경사스러운 터에 세운
궁궐'을
의미한다.
굳이 전주에 터를 잡은 이유를
경기전이라는 이름에
드러낸 셈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5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탁 트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전주 이 씨 시조인 이한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가 있고,
예종 임금의 탯줄이 보관된 태실 유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태실 유적을 통해 왕가의 혈통을 귀히 여겼던
당시 풍습을 엿볼 수 있다.
관광객들이 경기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조선 창업주의 용안을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정전.
정전은 한강 이남에서 유일하게
궁궐식으로 지어진 건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이곳에 봉안된 태조 어진은
1442년에 그려진 것을
고종 왕실에서 원본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현존하는 태조의 어진 중에서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원본의
형상이다.
[ 태조 이성계의 어진 ]
태조 어진을
들여다보니 의문점이 생겼다.
어진 속 태조는
흔히 봐온 조선 왕의 상징인
붉은 홍룡포 대신
청색 복식을 하고 있다.
경내 해설사를 통해
대략의 이유를 추정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설이 있다.
왕의 복식이 정착되기 전인
조선 초 태조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그 하나
,
다른 하나는
해가 뜨는 바다의 푸른색을 통해
시작의 의미를 담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역사의 어느 한 지점도
이유 없이 완성된 것은 없구나.
모든 것이 제각각의 의미를 담아
오늘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전 뒤로는
태조 어진 이외 조선 왕들의 초상을 모신
어진 박물관이 있다.
영조에서 순종에 이르기까지
역사책 속에서
혹은 영화 속에서
만나왔던
왕들의 모습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확인되지 않은 추정된 모습이라 할지라도
시대를 거슬러 그들과 조우하는 일에
절로 숨을 죽이게 된다.
조선왕조 500년은 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화려했던 역사이다.
추억 어린 고향 길 곳곳을 거닐며
조선왕조의 뿌리를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피로 시작된
조선의 온당치 못한 시작을,
또 유교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퇴행시킨
적지 않은 사회문화적 오점들을 떠올리며 씁쓸하기도 했다.
만약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그리하여 고려의 역사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있을까?
내 마음속 고향 전주는
소외된 지방 소도시로서의
아린 느낌이곤 했었다.
소위 뜨는 관광지로 주목받기 시작할 즈음,
나는 한 걸음 나아간 듯한 고향의 성장이
내심 뿌듯했었다.
다시 만난 전주는
급작스러운 변화에
어수선한 상업공간으로 채워진 거리가
딱하게 느껴졌다.
긴 안목으로
역사문화벨트로서의 한옥마을을
고민해야 할 때라 생각되었다.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상업지구 내 이름 모를 먹을거리와 놀이문화,
인기에 편승해
터무니없이 상승한
한옥마을 부동산 거품에 대한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이다.
한옥지구의 젠트리피케이션은
많은 전문가들과 지역민들 사이
공통의 고민거리이다.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안다.
부디 관광산업의 발전과
온전한 역사문화 보존 사이에서
신중하게
접근해 가길.
옛것에 새로운 것을 더해
과거와 현대의 조화를 타협해 가는
전주 한옥마을의 건승을
기원해 본다.
<사진 : 백과, 뉴스 등 포털 내 이미지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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