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속에 살아가다 보면
논리적으로 재단 어려운 무게의 관계도 있다.
더욱이, 하루하루 체력과 감정을 조금씩 갉아먹는
지속적 소모를 요하는 관계라면?
말 한마디를 삼키고,
감정을 접어두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선택들이 반복될 때
우리는 어느 순간
왜 이렇게까지 지쳐 있는지조차
설명할 언어를 잃는다.
이 괴로움은 생각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덜어낼 수 없는 '관계'를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전문가나 종교인 등 '지혜로운' 이들의 조언 앞에
지나치게 자책하기도 한다.
부부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
고부·처가 갈등...
강연자들의 조언은 분명 옳다.
선명하고,
정제되어 있고,
방향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조언을 절대적 기준으로
질문자의 삶이 평가되어 버리는 순간이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당신이 따라오지 못한다면
그건 아직 내려놓지 못해서다,
당신이 성숙하지 못해서다."라고.
조언에 따르지 못한 이들은
정말로 부족한 인간일까.
예컨대, 외도나 배신의 상처를 고백한 질문자들은
이런 말을 듣는다.
"헤어질 게 아니라면 용서해라."
"용서하지 못하겠으면 깔끔하게 정리하면 된다."
이 말들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감정의 밀도다.
배신당한 사람에게 용서는
결단 이전에 통과해야 할 감정의 폭풍이며,
헤어짐은 결론이 아니라
삶 전체를 다시 재정렬해야 하는 '큰 사건'이다.
비슷한 조언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자식은 별개의 존재이니,
부모는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한다."
훌륭한 시선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현실의 부모에게
자식의 선택과 삶을 온전히 분리해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자식이 반복적으로 상처받는 선택을 할 때,
부모로서 지켜온 가치와
정면으로 어긋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모든 것을 '객관적 거리'로만 감당하라는 말은
현실의 감정 앞에서 쉽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부모가 덜 성숙한 인간이라고 재단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같은 밀도의 고통을 통과해보지 않은
제3자의 말은
아무리 현명해 보여도 한계를 가진다.
그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문제는 계산되지 않는 것.
이성적으로 옳다는 판단이
곧바로 마음의 수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조언을 구한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방향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나 좀 도와달라" 호소하는 것이다.
그 손짓을 향해
"왜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느냐"라고
묻는 순간,
이제 조언은 위로가 아니라 위계가 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자리에서 말하고
있고, 너는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암묵적인 구도가 만들어진다.
누군가는 용기 내어 질문했을 TV쇼 강연장.
그 공간에서 고통은 이해가 아닌, 평가되는 듯했다.
질문자는 자신의 괴로움 위에
또 하나의 짐, 자책감까지 얹은 표정이다.
그 과정이 고스란히 전파를 타고 있었다.
옳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과
그 길을 실제로 걷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그 거리를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 앞에서 말을 늦출 수 있다.
TV강연이 더 많은 부분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인생 조언마저 '쇼'가 되어버리지 않도록.
지쳐버린 그대의 삶은 실패도, 부끄러움도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서
관계를 책임지고 살아온 흔적일 뿐이다.
고개 숙인 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강연자의 조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당신이 미성숙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자리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다는 증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