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작은, 방송작가가 제일 쉬웠어요.

by The reader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사실 열 번씩이나 찍을 필요는 없었다.

두 번의 공모 노크에

덜컥 방송국 문턱을 넘게 된 그때가

스물셋 즈음이었을 것이다.


왜 하필 방송작가였는지 물을 때마다

듣기 좋게 포장하던 막내시절도 있었지만

적당히 뻔뻔해진 중년의 작가는

이제 당당히 말한다.

'윤상' 만나려고 방송작가 됐다, 고.


그렇다.

지금은 어엿한 중년의 음악감독으로 인정받는

이 남자 '윤상'말이다.


90년대 초 윤상이 2집을 발표했을 즈음

내 마음은 이미 여의도로 돌진 중이었다.

팬클럽이 되어 '오빠~'를 외치며

만나는 방법이 가장 빨랐겠지만

나는 그렇게 순수한 부류가 못되었던 것 같다.

방송국에 들어가 당당하게 동료로

내 가수를 보고 싶은 욕심.


"그래. 일로 만나는 사이가 되자!"


열일곱 여고생이 품기엔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꿈이었지만

적어도 그 꿈은 내게 달릴 수 있는

채찍이 돼주었다.


공부를 월하게 했더라면

PD가 되려 했을지도 모른다.

미모가 보다 월등했다면,

혹은 월등한 미모

의느님 알현 비용이 있었다면

아나운서 쪽으로 돌진했을 수도 있었겠다.

내가 가진 환경과 재능 안에서

조금만 더 노력해 이룰 수 있을

방송 입문의 방법을 고민하니

내겐 방송작가가 딱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간사하다.

작가가 되어 보고팠던 '윤상'을 출퇴근길

보게 됐지만 막상 밥벌이 앞에서

스타에 대한 환상 따윈 보따리 풀 겨를이

없더라는 것.

윤상 오빠보다 당장의 회의 준비와

원고 마감이 더 급한,

그저 팍팍한 삶의 현장이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방송가의 그 흔한 '빽' 한 줄기도,

서넛 건너 하나라는 SKY학벌도 없었지만

무슨 운명인지 퇴짜 경험 한 번 없이

졸업도 하기 전 습작 대본 한편으로

덜컥 공모를 통과해 버렸다.

그것도 한 시대를 대표하던 프로그램으로!


남들 미팅하고 MT 갈 때

컴퓨터 앞에 엉덩이 붙이고 습작하던

인고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마저 긴 시간은 아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운이든 대본빨이든 딱 거기까지!

중요한 건 입문이 아닌

그 이후의 자기 증명이었다.

쉽게 들어갔지만

쉽게 버틸 수도 나올 수도 없는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 온 20여 년.

나를 충분히 증명할 수 없어 피멍드는 쓴맛은 오히려 입문 이후부터 시작된다.


두 주먹 불끈 쥐고 김은숙ㆍ이우정만큼 되지 말란 법 없지만 아무나 그들이 될 수 없는 현장.

가늘고 길게 버텨온 보통 작가의 20여 년엔

매 순간 불확실성과 회의가 깃들 수밖에 없다.

성공담은 많이도 들어왔을 테니

언젠가 나는 실패의 경험들을 풀어내기로 한다.

방송작가 '실패기'라니.

쓰디쓰지만 그것이 내 전공분야이니

어쩔 수 없는 걸로 칩시다.



매거진의 이전글취재기록 ; 푸진 굿 푸진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