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사실 열 번씩이나 찍을 필요는 없었다.
두 번의 공모 노크에
덜컥 방송국 문턱을 넘게 된 그때가
스물셋 즈음이었을 것이다.
왜 하필 방송작가였는지 물을 때마다
듣기 좋게 포장하던 막내시절도 있었지만
적당히 뻔뻔해진 중년의 작가는
이제 당당히 말한다.
'윤상' 만나려고 방송작가 됐다, 고.
그렇다.
지금은 어엿한 중년의 음악감독으로 인정받는
이 남자 '윤상'말이다.
90년대 초 윤상이 2집을 발표했을 즈음
내 마음은 이미 여의도로 돌진 중이었다.
팬클럽이 되어 '오빠~'를 외치며
만나는 방법이 가장 빨랐겠지만
나는 그렇게 순수한 부류가 못되었던 것 같다.
방송국에 들어가 당당하게 동료로
내 가수를 보고 싶은 욕심.
"그래. 일로 만나는 사이가 되자!"
열일곱 여고생이 품기엔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꿈이었지만
적어도 그 꿈은 내게 달릴 수 있는
채찍이 돼주었다.
공부를 더 탁월하게 했더라면
PD가 되려 했을지도 모른다.
미모가 보다 월등했다면,
혹은 월등한 미모 살
의느님 알현 비용이 있었다면
아나운서 쪽으로 돌진했을 수도 있었겠다.
내가 가진 환경과 재능 안에서
조금만 더 노력해 이룰 수 있을
방송 입문의 방법을 고민하니
내겐 방송작가가 딱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간사하다.
작가가 되어 보고팠던 '윤상'을 출퇴근길
보게 됐지만 막상 내 밥벌이 앞에서
스타에 대한 환상 따윈 보따리 풀 겨를이
없더라는 것.
윤상 오빠보다 당장의 회의 준비와
원고 마감이 더 급한,
그저 팍팍한 삶의 현장이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방송가의 그 흔한 '빽' 한 줄기도,
서넛 건너 하나라는 SKY학벌도 없었지만
무슨 운명인지 퇴짜 경험 한 번 없이
졸업도 하기 전 습작 대본 한편으로
덜컥 공모를 통과해 버렸다.
그것도 한 시대를 대표하던 프로그램으로!
남들 미팅하고 MT 갈 때
컴퓨터 앞에 엉덩이 붙이고 습작하던
인고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마저 긴 시간은 아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운이든 대본빨이든 딱 거기까지!
중요한 건 입문이 아닌
그 이후의 자기 증명이었다.
쉽게 들어갔지만
쉽게 버틸 수도 나올 수도 없는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 온 20여 년.
나를 충분히 증명할 수 없어 피멍드는 쓴맛은 오히려 입문 이후부터 시작된다.
두 주먹 불끈 쥐고 김은숙ㆍ이우정만큼 되지 말란 법 없지만 아무나 그들이 될 수 없는 현장.
가늘고 길게 버텨온 보통 작가의 20여 년엔
매 순간 불확실성과 회의가 깃들 수밖에 없다.
성공담은 많이도 들어왔을 테니
언젠가 나는 실패의 경험들을 풀어내기로 한다.
방송작가 '실패기'라니.
쓰디쓰지만 그것이 내 전공분야이니
어쩔 수 없는 걸로 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