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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neaufgabe Aug 03. 2022

픽션들로부터


배드 럭 뱅잉에서 특별히 곱씹게 되는 이미지는 주인공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스치듯 지나가서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어떤 단역들이다. 처음으로 나에게 인지된 그런 종류의 인물은 주인공이 시장을 걸을 때 프레임 안쪽으로 난입하는 한 할머니인데 그는 주위의 여느 인물들과 다를 바 없이 걷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며 얼굴을 들이민다. 주인공을 향해서가 아니라 카메라를 향해서 말이다. 꽃을 들고 있었을 수도 있고 꽃 대신 먹을 것을 들고 있었을 수도 있는 그는 그렇게 카메라를 향해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을 사겠느냐고 물어왔던 것 같은데 그 부분까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곧바로 그는 무엇인가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이 몸체를 돌려서 자신이 가던 길을 간다. 또 어떤 장면에서는 주인공이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앞모습을 비추다가 마침내 신호가 바뀌었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는 뒷모습으로 이어지는데 그동안 그의 주변에서 마찬가지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때가 되었을 때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은 역시 ―아마도 아스팔트 찻길 중앙선 위에 서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카메라를 계속해서, 그러나 너무 티를 내지는 않으려는 듯이 흘긋거린다. 나아가 그들은 저 카메라가 지금 무엇을 찍는 중인지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크지 않은 몸짓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내가 보기에는 결국 그들로선 지금 저 카메라가 무엇을 찍는 중인지 확인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그제서야 저곳에서 주인공은 딱히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현실의 행인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가 닿을 수 있었고 그래서 아차 싶었고 스크린을 통해 드러나는 지금 저 장면을 단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언젠가 이 세상에서 지나간 어떤 순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도 좋을 것이다. 만일 그때 그 장면에서 영화와 현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어떤 장벽이 무너졌다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은 영화인가 현실인가.


이와 비슷한 느낌을 몇 년 전 창비 겨울호에 발표된 황정은의 소설에서 느꼈던 적 있다. 황정은은 내가 한동안 가장 좋아했던 한국의 작가였고 그 소설은 내가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그의 작품이었다. 사실 그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콕 찝어서 말하기란 지금으로선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는데 따지고 보면 그건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인 파씨의 입문에서 일곱 번째에 위치한 단편으로 시작되는 그 경험은 그의 세 번째 소설집인 아무도 아닌에서 역시 일곱 번째에 위치한 단편으로 이어진 뒤 창비에 발표된 중편으로 마무리된다. 세간에는 그의 연작소설집 디디의 우산 중 ‘d’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세 작품을 서로 다른 시기에 저마다 다른 장소에서 읽었다. 파씨의 입문에서 읽은 디디의 우산은 작품 속 어떤 이미지들을 나의 인상에 선명히 각인시키기는 했으나 파씨의 입문에서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을 만큼은 아니었고 아무도 아닌에서 읽은 웃는 남자는 이게 디디의 우산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라는 점은 확인할 수 있었으나 작품으로서는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후 창비에 발표된 동명의 중편소설 웃는 남자를 읽던 어떤 순간 그전까지 세 작품을 통해 독자로서 경험해왔던 모든 감상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나는 그 순간에 대해서 어딘가에 이렇게 스크랩해두었다.


도도는 고시원 방에서 디디가 읽다 만 박조배의 책을 집어든다. 노란색 가름끈이 끼워진 246페이지와 247페이지를 편다. “246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이것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247페이지의 첫 번째 문장은 이것이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다.” 이튿날 도도는 일을 마치고 박조배를 만나러 명동으로 간다. 박조배는 명동에서 여전히 음반과 양말을 팔고 있다. 박조배는 도도를 향해 왜 디디와 함께 오지 않았느냐 묻고, 도도는 같이 오지 못했다고 답한다. 그날 저녁 도도는 박조배와 함께 국수를 먹고, 오래간만에 걷고 또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 스친 고유명은 회현사거리, 광화문, 플라자호텔, 서울광장, 시청 삼거리, 세종대로……. 거대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잔디 위를 서성인다. 무대 위쪽에 모형배 한 척이 조명을 받으며 떠 있다. 아래쪽이 파랗고 위쪽이 흰 그 배를 도도는 알아본다. 오늘이 1주기라고, 박조배는 말한다. “그 배가 가라앉은 지 1년이 되는 날. 추모 행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저녁 장사를 완전히 놓을 수는 없어 광화문 분향소에나 가자고 마음먹고 있었다고, 네가 온 덕분에 조금 일찍 나왔다고 박조배는” 말한다.


나는 황정은의 오래된 소설들을 좋아했다. 그런 소설들 속에서, 대체로 그의 인물들은 사람다운 이름을 지니지 않았고 사람다운 성격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사건다운 사건을 통과하지 않고 성별은 어딘지 불투명했다. 나는 그런 설정들을 통해 그의 작품이 획득하는 정치적인 리듬과 이미지를 좋아했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모두 담아낼  없을 만큼 좋아했다. 그랬던 그의 글쓰기는 모두가 기억하는  시간을 기점으로 변했다. 도도와 디디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이름을 되찾고 그들이 걷거나 스치는 땅과 건물 들이 이름을 되찾으면서 도도는 2015 4 16일의 광화문 광장에 발을 디딜  있었다. 현실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분명히 기억하는 시간의 공간으로 잠입함으로써 2010 여름에, 2014 가을에 발표된  편의 소설에서 소설  인물로만 남아있던 도도는 너무나도 분명한 현실  인물로 탈바꿈한다. 도도는 다소간 어리둥절한 태도로, 마치  세상으로 들어서는 문을 처음 열어젖힌 아이와도 같은 모습으로 현실의 이미지를 수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쯤에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나에게 있어 픽션과 현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허물어진  이미 몇년  그때부터였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 이곳의 순간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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