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르 여행기 - 2025Q4 일본
유학 시절 여행을 자주 다녔다. 교통은 Flixbus나 Ryanair로, 숙소는 게스트하우스나 에어비엔비를, 전시는 학생증. 유럽은 한국에서는 큰 맘 먹고 와야하는 곳이지만 나 같은 주머니 가벼운 유학생에게는 밀도 높은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당시 내겐 여행이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귀국한 이후에는 여행은 많이 하지 않았다. 회사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여행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보는 풍경에 익숙해질 때면 낯선 풍경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이렇게 쌓인 마음들은 여행에 대한 갈망으로 내 마음속에 새겨졌다. 그때 이후로 주기적으로 여행을 가고 있다. 여유의 유무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번 여행 컨셉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일본 공예 도시 순례’다. 여행은 가나자와를 시작으로 교토, 나라 그리고 고베에서 끝이 났다. 그중 가장 핵심은 가나자와다. 이 여행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가나자와가 어떤 도시이길래 나는 이곳을 여행의 목적으로 정한 것일까?
일본에는 각 지역마다 공예장인들이 많긴 하지만 가나자와는 도시가 공예 그 자체다. 지방 정부 조직 또는 도시 설계 집단에 공예가들도 꼭 포함되어야 하는 조항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도시 곳곳에 공예의 손길이 묻어있다. 아마도 이것에 대한 의문은 역사가 대답해주지 않을까 싶다.
가나자와는 에도 시대에서 도쿠가와 쇼군 가문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졌던 ‘가가번’의 중심이었으며, 이곳을 마에다 가문이 다스렸다. 일인자는 이인자가 언젠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마에다 가문은 중앙 정부에 도전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막대한 경제력을 군사가 아닌 공예, 예술, 학문과 같은 문화 부흥에 투자했다. 예를 들어, 교토와 에도의 유명한 예술가와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기술을 전수하게 하게 했다. 가나자와의 공예 DNA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가나자와에서 느낀 첫 인상은 이곳 사람들과 건물이 멋이 있다는 점이다. 아름답다, 이쁘다, 미학적이다라는 표현 보다는 ‘멋’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다. 가나자와에 점심 즈음 도착한 나는 호텔에 짐만 맡기고 근처 시장과 카페를 돌아다녔다. 반나절 동안이지만 근사한 스타일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멋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는 풍경도 멋진 법이다. 나무 위의 원뿔 형태의 모습은 가나자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키츠리’라는 조경 기술이다. 가나자와 겨울철에 볼 수 있는데, 이 지역의 눈은 높은 수분 함량으로 인한 무게로부터 나뭇가지를 보호하기 위한 기능주의(Functionalism)적 조경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벽에 짚으로 엮은 멍석을 덮어두는 것도 이 지역의 독특한 풍경이다. 눈의 수분으로 인해 흙벽이 부식되는 것을 막기도 하고, 수분이 얼거나 녹기를 반복하면서 균열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단열재 역할을 하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자연의 재료로 기능적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하다는 점이다. 마치 하나의 공예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나자와에는 유명한 불교 철학자가 있다. 스즈키 다이세츠라는 사람인데, 선(Zen) 개념을 서구 세계에 알린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흔히 외국인들이 말하는 Zen 스타일, Zen하다 하는 말은 사실 이 사람을 통해서 알려진 것이다. 선 개념은 동양 불교 철학에서 온 것이지만, 이것을 외국인의 관점에서 정리를 하고 소개를 하는데 공로했다. 참고로 이 사람은 현대예술과도 관련이 크다. <4분 33초>로 유명한 존 케이지는 1950년 스즈키 다이세츠가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열었던 선(Zen) 강의를 들었다. 당시 뉴욕 아티스트들에게 형태가 없는 형태라는 주제로 빠져들게 했다.
스즈키 다이세츠는 가나자와 사람인데, 이곳에는 그를 기리는 박물관(D.T. Suzuki Museum)이 있다. 한국의 사유원을 떠올리는 곳이다. 이곳은 관람객들이 명상적인 상태로 들어설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일부 공간에서만 사진 촬영이 되어서 사진은 많지 않다.
천장에 매달린 쇠사슬을 따라 물방울들이 떨어져 내려온다.
뮤지엄 전시 공간에서 바라본 박물관 입구는 마치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가나자와에 있는 동안 하루를 제외하고 눈과 비가 계속 왔다. 나는 운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