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패션스쿨에서 배운 모든 것
나의 친구가 이 글을 보고 이렇게 평가했다. 누군가의 스케치북에서 일어나는 일을 디자이너 입장에서 한 줄씩 풀어내서 이해시켜주는 점이 좋다고. 특히 처음 디자인을 배우는 사람은 자신만의 디자인 언어를 어떻게 창조해나가는지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스케치북 안과 바깥을 교차해나가면서 이 과정을 설명하는 글의 시선을 높이 평가해줘서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다.
이 장에서는 한 학생의 디자인 여정의 일부를 소개한다. 메이르 트레이닝 과정에서 학생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디벨롭하는지 엿볼 수 있는 사례를 다룬다. 이를 통해 여러분은 자신만의 ‘디자인 언어’를 창조하는 방법에 대한 감을 익히게 될 것이다.
많은 독자분들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디벨롭하는지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작업 과정을 사례로 활용하는데 허락해준 학생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블로그(https://blog.naver.com/slaaplekker)를 하다보면 정말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 이유는 책이나 강의로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학생 뿐만 아니라 현업 디자이너들도 배우고 싶어하는 일종의 예술이다. 마치 즉흥연기 처럼 말이다.
디자인 과정은 디자인 여정(Design Journey)이라 부른다. 나의 전자책 오렌지북을 읽은 분들은 이 개념을 알 것이다. 디자인 과정은 스티브잡스가 지적했듯 1-2-3-완성!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디자인 과정은 정해진 절차대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작업을 절차에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찍어낸 결과물은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
디자인 여정은 오히려 진흙탕 싸움과 비슷하다. 논쟁하고, 협상하고, 조율하는 앞치락 뒷치락거리는 행위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여정에서 길을 잃고 장애물에 빠지지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대화하는 것, 이것이 디자인 여정의 본질이다.
학생과 나, 우리가 합주하는 디자인 여정은 ‘자연’에서 출발한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학생은 자연에 대한 개인적 추억을 재현하고 싶었다. 사람마다 자연을 생각하면 각기 다른 감정들을 떠올리는데, 그에게 그 감정은 바로 따뜻함이었다. 가족 사진, 유년기 시절 입은 옷, 주먹만한 발 아래 겨울철 잔디밭, 푸른 하늘 아래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 이것들에 스며든 온기를 우리는 패션이라는 언어로 구현하고 싶었다.
자연의 모습은 여러가지다. 나무도 있고, 하늘도 있고, 꽃도 있고, 사람도 있다. 학생은 꽃을 쫓고 있었다.
어느날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쇼장을 꽃으로 뒤덮고 싶어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머릿속에 있는 스테이지를 시각화해보세요.”
그리고 며칠 뒤 그는 스케치북을 가져와 꽃으로 뒤덮힌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그림 1]의 오른편에는 학생이 구상한 공간 스케치가 보인다. 중앙에는 모델들이 걸어올 런웨이가 보이고, 양측에는 관객석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학생은 관객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오페라의 무대장치 뿐만 아니라 향, 촉감 등 오감을 자극하고 싶다는 메모도 남겨두었다. [그림 1]의 왼편은 그가 구상한 스테이지를 시각화한 작업이다. 꽃과 잎은 조화를 사용했고, 무대 커튼은 색바랜 빨간색의 천으로 표현했다. 2D 스케치와 3D 현실 사이의 다리를 놓아주는 중요한 작업이다.
학생은 이 페이지를 보여주는데 주저했다. 나는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 그 어떤 프로 아티스트들도 처음 시도하는 작업에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조잡해보이는 꽃더미 속에 선명한 아름다운 비전을 보았다. 나는 학생을 격려했다. 자신을 믿고 계속 밀고 나가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학생은 꽃들[그림 2]을 가져왔다.
패브릭 플라워였다. 연두색, 청록색, 노란색들은 코튼 원단들을 손수 염색했단다.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나름 스트라이프 패턴으로 염색했다. 색을 입힌 면들을 모아 납작한 꽃 한 송이로 만들었다. 노란색 줄기도 직접 뜨게질하여 만든 것이다. 울퉁불퉁하고 거칠지만 이 중 어느 한 면도 학생의 손을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마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아이들이 자신들이 고이 간직하고 있던 재료들을 꼬깃꼬깃 접어 만든 것처럼. 좋은 작업의 시작에는 항상 천진난만한 아이의 향이 난다.
학생은 여전히 자신감이 없었지만 지난 번보다 조금은 나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좋은 신호다. 보잘것 없어보이는 작업도 매일 1mm 씩 전진하면 나아질 수 밖에 없다. 이 진리는 우리를 재능에 관한 심리적 족쇄에서 해방시킨다. 재능이란 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개선하고 전진한 사람들이 받는 찬사에 불과하다.
나는 학생이 여기서 더 자유롭게 생각하길 바랬다. 학생은 지금까지 상상 속 꽃을 플라스틱과 패브릭으로 구현했다. 그렇다면 종이나 그림으로 꽃을 표현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야기를 하던 중 복합기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함께 만나서 이야기나누는 공간 한켠에는 사무용 복합기가 있다. 여기엔 스캔 기능도 있다. 스캔의 절차는 흥미롭다. 스캐너에게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여주면 빛으로 한층한층 훑은 뒤 자신이 본 것을 이미지로 뱉어낸다. 이 스캐너에게 꽃을 보여주면 무슨 이미지를 뱉어낼지 궁금해졌다.
스캐너가 꽃들을 보고 종이들을 뱉어냈다. [그림 3]의 왼쪽은 흰색 배경이고 오른쪽은 어두운 배경이다. 어두운 배경이 나온 이유는 스캐너의 천장을 열고 스캔을 해서 빛 반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우주를 떠돌아 다니는 꽃처럼 보였다.
학생은 왼쪽 흰색 배경의 이미지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 선생님. 뒷모습이 나와버렸네요?”
무슨 말인가 해서 자세히 바라보았다.
스캐너가 뱉어낸 흰색 배경의 이미지[그림 4]를 자세히 보니 학생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패브릭 플라워를 만들 때 접합 부위가 그대로 노출된 것이었다. 생화는 3D여서 앞뒤의 구분이 없지만 패브릭 플라워에는 앞뒤가 있어서 구분이 쉽구나. 그런데 이 지점에서 머리 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우리는 꽃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한 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우리가 매일 바라보는 사물들은 대체로 앞이나 옆 모습이다. 사람도 얼굴을 많이 보지 뒤통수를 볼 일은 많지 않다. 꽃도 마찬가지다. 꽃을 화병에 끼울 때도 뒷모습이 보이도록 두진 않는다. 우린 사물의 뒷모습이라는 낯선 영역을 발견했다. 그리고 낯섦은 예술이 좋아하는 토양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깨달음을 붙잡고 싶었다. 붙잡고 싶다면 기록해야 한다. 나는 즉시 학생에게 관찰 드로잉을 그릴 것을 제안했다. 관찰 드로잉 워크샵을 통해 훈련된 학생은 주저없이 연필을 들고 스케치북 백지를 향했다.
나는 스캐너가 읽은 꽃의 모습이 어떻냐고 물어보았다. 학생은 모습을 유심히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딘가 부러진 것 같아요.”
관찰하는 방법을 훈련하면 사물에서 감정을 추출하는 능력이 생긴다. 그는 꽃의 부러진 부분, 연약한 부위, 찢어지거나 닳은 부분을 스케치북 위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타인의 상처를 볼 줄 아는 감수성의 소유자인 그는 자신의 시야에 포착된 감정들을 놓치지 않고 꽃이라는 형상 안에 넣고 있었다.
옆에서 그가 그리는 꽃을 보는데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가 꽃에 대해 말하며 그림을 그리는데, 마치 꽃을 사람처럼 대하는게 아닌가. 나에겐 낯선 시각이었다. 그런 시각으로 그가 그린 꽃을 보니 풀이 죽은 사람의 뒷모습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우린 사람들의 뒷모습을 볼 일이 없다. 화려한 겉모습 만큼이나 어두운 뒷모습을 우리는 잘 보지 못한다. 나는 꽃에서 현대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마 그는 그의 기억 속 누군가를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포착한 꽃을 인간이라는 주제로 확장하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했다. 그는 나의 의견에 동의했고, 우리는 스스로 꽃이 되어보기로 했다.
우리는 어디서 사진을 찍을지 고민했다. 가까운 곳에 철제 손잡이가 있는 아이보리 톤의 페인팅으로 칠해진 벽이 보였다. 이곳은 이제 우리의 모습을 담을 캔버스 역할을 할 것이다. 찰칵 소리 후 스마트폰에 2진수로 만들어진 이미지 파일이 만들어지는 순간 우리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우린 지금까지의 짧은 여정을 한 페이지에 정리해보기로 했다. 스캐너가 그려낸 패브릭 플라워, 아웃라인, 텍스처, 구불어진 꽃과 사람 그리고 짧막한 메모. 파편화되어 있던 이미지들을 한땀 한땀 이어 붙였다. 서로 상관없던 것들을 나란이 두자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제 그가 만든 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어두운 모습을 담아내는 상징물이 되었다.
학생이 자신만의 디자인 언어를 창조하는 순간이었다.
이 장에서는 학생이 아이디어를 디벨롭해나가는 시각화 과정을 다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만의 디자인 언어를 창조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카피할 수 없는 학생만의 무기가 될 것이다.
정해진 템플릿, 스타일, 끼워맞추기는 없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따라 달성한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 여정은 하나의 즉흥연기와 같다. 즉흥연기는 오직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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