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갈수록
兄, 안녕!
25년... 바닷가 모래알만큼 셀 수 없는 날들이 지나버렸어.
그 많은 날들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기억들이 부서지는 파도의 알갱이처럼 이리저리 흩어질 때도 그랬고, 맑은 날 강렬한 햇살이 눈두덩을 찌를 때도 그랬고, 대나무처럼 곧은 비가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질 때도 그랬고, 흰 눈 덮인 세상이 너무도 눈부셔 기억조차 하얀 망각의 강 속에 빠져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그랬고... 언제나 그림자처럼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리움이었어. 때론 고통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리기도 했지. 아픔은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옅어지는 건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깨끗이 닦은 유리창처럼 점점 선명해지기까지 했지.
이제야 兄에게 펜을 들었어. 실로 오랜만이지. 아마도 兄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내 편지를 받았던 건 1987년 겨울, 12월의 어느 날이었을 거야. 내가 군 제대를 앞두고였을 테니. 이제 틈 나는 대로 兄에게 이런저런 얘길 하려고 해. 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물론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도 하나둘 兄에게 풀어놓을 생각이야. 어제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오늘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내일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거야. 兄에게 쓰는 편지지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도 괜찮은 거지? 다른 사람들이 먼저 읽을 수도 있을 거야. 그래도 괜찮은 거지? 형은 항상 그랬으니까. 내 말이라면 무어든 다 들어주었으니까.
오늘 형에게 처음 하고 싶은 얘기는 형이 내게 가르쳤던 기타 이야기야. 1977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지. 고등학생이었던 형은 늘 폼나게 기타를 쳤지. 그 시절 유행하던 가요는 물론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 같은 팝송도 근사하게 연주했지.
물론 노래도 부르면서. 형 친구들도 형을 부러워했었잖아. 형은 고사리 같은 내 손에 내 몸만 한 기타를 안겼지. 그때 내게 내민 노래가 뭔지 기억해? 바로 김정호의 '날이 갈수록'이었어.
<날이 갈수록>
가을 잎 찬 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들
루루루루 꽃이 지네
루루루루 가을이 가네
하늘엔 조각구름 무정한 세월이여
꽃잎이 떨어지니 젊음도 곧 가겠지
머물 수 없는 시절 우리들의 시절
루루루루 세월이 가네
루루루루 젊음도 가네
보통 처음 기타를 배울 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시작하던 때였는데, 형은 내게 좀 특이한 노래로 첫 기타를 가르친 거지. 아마도 1975년에 개봉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 영향도 있었겠지? Am, Dm, G, C, E7코드를 처음 배웠지. 그 노래를 마스터하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였을까? 기억나지는 않아. 그렇게 형은 내게 기타를, 음악을 안겨줬어. 형에게 쓰는 첫 편지. 그 얘길 하고 싶었어. 내 기타의 뿌리... 물론 나는 지금도 기타를 치고 있어. 그 '날이 갈수록'을 배운지 39년이 됐어... 39년.
앞으로 형에게 할 얘기가 점점 많아질 거야. 그때마다 귀찮아 하지 말고 다 읽어 주겠지? 형과 공유했던 시간들, 그리고 형이 떠나버린 후의 시간들, 또 나도 아직 모르는 시간들이 이 공간에서 차곡차곡 쌓이게 될 거야.
오늘은 날씨가 '겨울답게' 제법 추워. 찬 바람을 맞으니 바람이 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정말 눈이 펑펑 내려주었음 좋겠어. 아주 펑펑...
2016년 1월 12일. 형의 사랑하는 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