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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산팔육 Mar 08. 2020

그날의 기억


다들 잘 지내고 있으신가요. 코로나가 본격 확산된 이후로 저는 외부 일정을 일절 삼가고 회사와 집만 오가고 있습니다. 사실 코로나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여전히 지하철에서는 졸거나 글을 쓰고 집에 오는 길에는 배달 음식을 고민합니다. 집에 도착하면 근 삼 주째 칩거에 들어간 서하가 어제도 봤던 티비 프로를 열중하여 보고 있습니다. 와이셔츠를 훌훌 던지며 인사를 부탁해보지만 화장실에 들어갈 때까지 눈길 한번 주지 않네요. 그래도 아이들은 딱합니다. 미세먼지 때문에 독감 때문에 수족구 때문에 지금껏 밖에 나가질 못했는데 코로나라니요. 샤워를 하며 이런 참담한 생각을 곱씹는데 문득, 당신들이 생각났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빈 집을 나와 늘 밖에서 해 질 녘까지 뛰어놀던 당신들. 확진자가 만 명에 달할 거라는 아니 확진율에 변곡점이 왔다는 이 세상의 바깥에 앉아있던 당신들이 생각났습니다. 슬프게도요.


군대에 있을 때 우연한 기회로 교육 봉사활동에 차출된 적이 있었습니다. 대대장의 야망에서 비롯된 민관군 합동 사업이었는데, 민간 학교에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선정하고, 구청에서 남루한 주택을 개조한 공부방을 제공하면, 군에서는 대학에 재학 중인 영어능통자를 지원하는 사업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했으나 속은 비어있는, 전형적인 전시용 사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업의 어디에도 교육에 대한 내용은 없었기 때문이죠. 예감대로 떠들썩했던 개소식 뒤, 남은 것은 지역신문의 후면을 장식한 작은 기사와 급하게 소집된 동네 아이들 그리고 어린 병사 두 명이었습니다. 저는 영어능통자가 아니었으나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이유로 그날 아이들과 함께 전시되었습니다. 모두의 격려를 받으며 우리는 멋쩍게 인사했고 그 어색함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그 사진은 <군인 선생님의 특별한 수업>이라는 기사에 쓰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의 운명처럼, 전형적으로, 우리는 모두에게서 잊혀졌습니다.


제가 했던 일은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영어를 가르치다니 소가 웃을 일이었습니다. 저는 영어를 정말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서울의 대학을 다니면 영어도 잘할 거라는 대대장의 편견 때문에 참여하게 된 것인데, 그 오해의 대가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일단 군인 신분에 수업 준비는 애초에 불가능했고 제가 가진 거라고는 초등학생 앞에서도 감출 수 없는 영어 울렁증 밖이었습니다. 답답한 상황에 저는 그날 처음 보는 교재의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는 보이는 단어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Monday가 보이면 요일을 공부했고 dinner가 보이면 식사에 대해 배우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수준은 제가 굳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나빴습니다. 기억에 절반 정도는 알파벳부터 가르쳐야 했던 것 같습니다. 개중에는 정말 똑똑한 친구도 있었지만요. 아무튼 체계를 갖지 못한 채 학업의 주변부만 선회하던 그 과외활동을 수행하며 저는 복잡한 감정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선 아이들과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함께 지내면서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군인 월급을 털어서 아이스크림을 사 준 적도 있습니다. 뭐라 말하며 줘야 할지는 몰랐지만요. 하루는 공부방에 도착했는데 아이들이 들어가지 않고 계단에 앉아 떠들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공부방을 관리해 주시던 구청 직원분이 열쇠를 깜빡한 모양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계단에 앉아 아주머니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은 밖에서 노는 것이 익숙한 듯 추운 날씨에도 얇은 티셔츠 한 장을 걸치고는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그 왕성한 기운에 월급을 또 털지 않을 수 없었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계단에 걸 터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멀리서 석양이 다가왔습니다. 마을버스도 힘겹게 올랐던 산동네. 그래서 아주머니가 돌아오는데도 한참이 걸렸던 그곳에서 저는 점점 노란색이 되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석양은 참 평등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들을 보며 기도했습니다. 모두 잘 되길. 혹 잘 되지 못하더라도 너희 탓은 하지 말기를. 모처럼 이곳까지 행운이 왔는데 결국 온 게 나였으니.


그로부터 3달 정도 뒤 봉사활동은 끝이 났습니다. 아무래도 군 복무를 하며 주기적으로 사회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인사는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동네에 사는 필리핀 아주머니가 대신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Monday 보다 어려운 영어를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저는 전역을 했습니다. 군대에서 일은 모두 인생에서 지우자는 각오로 입대를 했기 때문에 그날의 기억도 그곳에 두고 왔습니다. 이후의 인생은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평등하지 않은 세상에서 늘 더 노력하는 인생. 지하철에서 마스크 안으로 뜨거운 숨을 내쉬며 남의 비말을 걱정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당신들이 생각났습니다. 스물세 살이 된 당신들은 어디서 이 수상한 시기를 견디고 있으려나요. 혹 그날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남아 있다면 그것은 저의 영어일까요 아이스크림일까요. 저도 어린 병사였다는 게 변명이 될 수는 있을까요. 신은 제 기도를 들었을까요. 모두가 구름으로 사는 근래, 그날의 기억이 석양처럼 다가왔던 하루였습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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