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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un 05. 2022

주방이라는 역사

나의 주방 일지-1

1.5평 정도의 주방 공간 안에서 나를 포함해 세 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삼겹살, 목살, 등겹살, 항정살을 주문에 따라 세팅해 내보내는 주방장님이 있고,

쏟아지는 접시와 기물의 설거지를 담당하는 이모님

그리고 찌개와 냉면 등 사이드 요리를 담당하는 나까지.


며칠 일하고 나서야 얼마 전까지 함께 일하 이모님이

몇 주 정도의 짧은 기간만 설거지를 맡아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느 날 낯선 얼굴의 이모님이 출근하셨고, 오늘 하루만 일해주기로 했다며

자신을 '파출부'로 지칭하셨다.

식당에서는 여러 업무의 담당자가 일을 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파출부'라는 일용직의 형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듯했다.


피크가 지나고 주문이 멈추기 시작하자,

우리 셋은 일을 멈추고 목욕탕 의자에 앉아 사소한 소개를 나눴다.


"총각은 왜 주방에서 일해? 주방일 힘든데."


'사람을 마주 대하기 힘이 들어서'라고 솔직하게 대답할 순 없었으므로

그냥 주방일이 하고 싶어서였다고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는 문득 이모님의 질문에 담긴 사회 일반의 사고가 의아해졌다.


저녁 내내 눈치 보지 않고 쉴만한 틈도 나지 않는 주방일은

왜 항상 여성이 담당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돼 왔을까.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 여성을 가정의 주방으로 밀어넣어버린 역사는

가정 안에서만 아니라 사회에서 '찬모', '파출부'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명명하면서

불평없이 고되고 지루한 일들을 담당하도록 강제해왔을 것이다.


남성들의 영역으로 상정되는 '노가다'만큼의 비용을 받지는 못하면서

고된 모성을 발휘할 것을 요구받는 '주방'의 자리는 왜 아직도 여성만의 영역일까.


그와는 별개로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

이모님의 질문처럼 주방에서 일하게 된 나는 어쩌면 여성화된 걸까?

그건 너무 어려운 질문이므로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어떤 결핍으로 인해 '주방'이라는 곳으로 도착하게 된 나와는 달리,

이분들에게는 결핍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하므로 혹은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그게 불만이면 다른 일을 해'라는 무책임한 권고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파출부 구함', '찬모 구함'이라는 표지 앞으로 내몰릴 것이다.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각임에도 불만에 가득찼다.

아마 앞으로도 우리가 우리의 처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날은 오지 않겠지.

그래도 이날은 '파출부' 이모님이 무심코 내뱉은 시원한 한 마디가 적지 않게 위로가 됐다.


"시벌 이걸 왜 내가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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