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고요와 만나는 순간이 있다. 페루 망코라에서 5일을 보내고 다음 행선지인 와라즈로 가는 티켓을 끊은 참이었다. 남은 시간을 보내려고 해변이 보이는 가까운 음식점으로 향했다. 음식을 주문하고는 비치베드에 누워 멍하니 바다를 바라봤다. 여름이었지만 바닷바람이 서늘했고 어디론가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에 초조한 마음도 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고 잠들기엔 바람이 너무 찼다. 해는 점점 내려가고 어둠이 내릴 것 같아 맘이 놓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참 편안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이자 다시 떠나야 하는 곳, 그리고 떠나온 곳에 아낄만한 어떤 미래나 추억도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나는 A나 B든지 1이나 2든지 어느 두 개념 사이에 아무 것도 아닌 채로 남아 있고 언제나 그럴 것이라는 무모한 안심과 그보다 큰 공허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공기처럼 무게 없이 떠 있다는 느낌과 함께 고요가 왔다. 어떤 사이 속에 있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었을 그 한없는 고요를 느껴보고 싶어 아직도 잠들기 전이면 망코라의 해변을 떠올려보곤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여전히 무엇이 되지 않았고, 여전히 임박한 시간의 티켓을 끊어놓은 것처럼 초조한데도 그때의 고요와 닮은 그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