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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19. 2019

실수의 역사

어젯밤의 실수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다면



내가 실수를 할 때마다 떠올리는 몇 가지 장면이 있다. 이들의 실수를 곰곰 상상하다보면 어느덧 내가 저지른 실수들은 득실을 타협할 수 있는 카드게임 같은 사소한 것으로 축소되곤 한다. 나의 행동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바꾸지도 못했고, 수천만 명의 목숨을 빼앗지도 않았으며, 끔찍한 인류 역사의 비극을 만들어 내지도 않았다. 살아 있는 것들은 소란하고 실수한다. 그래서 가끔은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1.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한때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을 배반한 것은 자신의 몸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저런 잔병에 시달렸던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나서는 과거와 같은 총기를 잃어버린다. ‘나폴레옹 평전’을 쓴 조르주 보르도노브가 “나폴레옹이 이룬 정복들 가운데 유일하게 오래 지속된 것은 인간의 마음을 정복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강렬하고 압도적인 인상과 명철함을 갖고 있었다. 또한 단 몇 번의 전투를 통해 일개 포병 장교에서 준장으로 승진할 정도로 군사적 전략과 판단력이 뛰어났다. 다만 마지막 전투였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815년, 폐위된 채 엘바 섬에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앵콩스탕호에 올라 파리로 돌아온다.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며 구체제에 신물을 느꼈던 프랑스 국민들은 왕당파에 대한 반감으로 돌아온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반겼다. 프랑스 인근 유럽 세계는 긴장했다. 곧바로 대 프랑스 동맹을 맺은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등이 선전포고를 한다. 전과 달리 호전성을 잃은 나폴레옹은 평화의지를 표명하고 협상을 제의하지만 프랑스를 한 번 굴복시켜보았던 적국들은 응하지 않았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전략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최대한 병력을 집중해 선두의 적군부터 신속하고 완벽하게 격파해 나가는 것이다. 이번에는 웰링턴의 영국연합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가장 먼저 나폴레옹과 부딪히게 됐다. 첫 격전지였던 리니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물리친다. 과거의 명성에 걸맞은 승리였지만 그 뒤로 실수가 이어졌다.      


과거와 같았다면 퇴각하는 프레이센군을 뒤쫓아 완전히 격파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몇 시간 동안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적군은 퇴각에 성공한다. 뒤늦게 그루쉬 장군에게 전 부대의 3분의 1가량의 군사를 주어 뒤쫓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 실수는 영국과의 교전 중 그루쉬의 병사들이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워털루 패배를 이끈 결정적 실수가 됐다. 하지만 아직 기회가 남아 있었다.      



나폴레옹은 영국군을 뚫고 브뤼셀을 점령하면 대 프랑스 동맹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국군은 브뤼셀로 향하는 목전인 워털루 인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진 몽생장에는 위고몽과 라 에 상트라는 농장이 있었고 영국군은 이 두 농장 건물을 거점으로 삼아 방어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적군이 기습에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새벽 시간에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전날 밤 폭우가 내려 작전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비가 오면 진흙 위로 무거운 포들을 이동시켜야 하는 탓에 병사들의 체력적 소모가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공격을 4시간 지연시키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또 다시 몇 시간을 지체한다. 결국 공격은 오전 11시쯤에야 이뤄진다. 늦은 공격 탓에 두 농장을 중심으로 한 전투는 각축전 양상을 띠게 된다. 뺏고 뺏기는 전투를 통해 영국군과 프랑스군 양측 모두 많은 군사를 소모한다.    

  

지루한 공방이 예상되자 나폴레옹은 휴식을 위해 미셸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기고 막사로 돌아간다. 나폴레옹은 쇠진한 몸과 지병 탓에 취한 잠깐의 휴식이 결정적 패인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휘를 맡은 네 원수는 영국군이 부대를 교대하는 모습을 후퇴로 오인하고 대부분의 기병부대를 돌진시켰다. 방진을 구축하고 기다리던 영국군 보병부대는 프랑스 기병부대 상당수를 섬멸시킨다. 돌아온 나폴레옹이 네 원수를 질책했지만 소용없었다. 이후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프랑스 후측면으로 전진해왔고 전세는 대프랑스군으로 기울게 된다. 이때까지 그루쉬의 군사들을 여전히 프로이센 쫓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의 작은 실수들은 워털루 전투를 패배로 이끌었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프랑스의 위력도 다시 빛날 수 없는 과거의 영광으로 사그라들고 말았다. 물론 나폴레옹만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적장들도 잦은 실수를 저질렀고 심지어 여러번 대패했지만 승리를 얻었다.  다시 폐위되어 남대서양 외딴 섬에 내쫓긴 나폴레옹은 1821년까지 특별한 실수 없이 죽어갔다.      



2. 카하마르카의 아타우알파  

   

단 한 명의 실수로 약 4천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있을까? 지리학자 디노반의 자료에 의하면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때 남미의 인구는 5000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스페인의 침략을 받은 1504년 이후 150년 간 전체인구가 400만 명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초의 아메리카 점령은 중미에 집중 돼 있었다. 현재의 남미 대륙으로 눈을 돌린 사람은 스페인 용병출신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였다. 1524년 피사로는 파나마 지역 총독 페드로 아리아스 데 아빌라의 허락을 받고 황금제국을 찾아 남미 대륙 탐험을 시작한다. 몇 차례의 실패 후 1532년에는 지금의 페루 방면까지 진출하게 된다. 피사로의 군대가 페루 내륙의 카하마르카라는 지역에 이르렀을 때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현지 병사를 통해 당시 남미를 지배하던 잉카 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가 카하마르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피사로는 곧바로 사신을 보낸다. 사신이 아타우알파에게 어떻게 만남을 이끌어 냈는지 전해지는 바는 없다. 다만 피사로와 아타우알파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갖고 만남을 갖게 된다.     

 

보병과 기병 일부를 포함한 병사 168명과 3정의 소총, 2문의 대포를 모두 동원한 피사로는 애초 점령이 목적이었다. 반면 8만의 병사를 거느린 아타우알파는 가까운 거리에 군사를 대기시키고 일부 근위대와 함께 피사로에게 향했다. 피사로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미리 요새를 점령하고 대포와 병사들을 매복시킨 상태였다. 이복형제를 살해하고 잉카 제국을 정복한 아타우알파는 가마를 타고 당당하게 나타났다.   

   


스페인 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레케리미엔토라는 선언문을 읽어주는 일이었다. 통보라는 뜻을 가진 레케리미엔토 선언문은 당시 아메리카 점령에 앞서 인디오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할 것과 왕을 섬길 것을 요구하는 일방적인 통보문이었다. 피사로는 또한 아타우알파에게 성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성경을 받아든 아타우알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며 그대로 던져버렸다고 전해진다. 이를 기화로 매복한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돌칼과 활을 무기로 사용하던 인디오들은 생전 처음 겪는 포성과 총성 그리고 말의 모습에 압도되었고 철갑으로 무장한 스페인군에 몰살당했다.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인질로 잡았다. 168명의 병사가 8만의 병사를 이긴 것이다.      


사로잡힌 아타우알파는 자신이 갇힌 방을 사람 키만큼 채울 수 있는 황금을 줄테니 살려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피사로는 금만 챙기고 풀어주지 않았다. 잉카 제국의 황제는 최후의 선택에 놓이게 됐다. 이교도로 죽으면 화형을 시키고 기독교로 개종하면 교수형에 처한다는 통보였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1533년 8월 29일 교수형을 당한다. 그는 최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내 이름은 후안, 이 이름을 가지고 죽어가는구나”. 개종한 그의 이름은 ‘후안 데 아타우알파’였다.     


이후 진행된 스페인의 남미 점령은 쉽지 않았다. 잉카의 후손들이 저항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결국 1572년 잉카의 마지막 지도자 투팍 아마루가 처형되면서 남미 대륙은 점령된다. 만약 아타우알파가 1만의 군사만 대동했더라도 스페인의 남미 점령은 더 늦어졌을 것이다. 혹은 4000여만 명 보다는 적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지 모른다. 역사를 바꾼 아타우알파의 실수는 비참할 정도의 순진성이었다.     



3. 덴마크의 유대인들     


불행이 노크를 하고 찾아왔는데도 문을 열어준 사람들이 있다. 만약 끔찍한 고통과 슬픔의 전조가 찾아와도 이를 허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저 습관이나 실수에 불과할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는 유대인들이 친절한 게슈타포에게 문을 열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저자 한나 아렌트는 당시 독일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 자발적이고 유효한 저항을 했던 유일한 국가로 덴마크를 꼽으면서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 덴마크의 협조를 받지 못한 독일 게슈타포들이 덴마크의 유대인들을 체포하는 장면이다. 그의 문장을 직접 읽는 편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베스트는 베를린으로 가서 모든 덴마크 출신 유대인을 그들의 소속에 관계없이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낸다는 약속을 얻었다. 이는 나치스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중요한 양보였다. 10월 1일 밤은 그들을 체포하고 바로 출발하는 날로 정해졌다. 배가 항구에 준비되어 있었다. 덴마크인들이나 유대인, 덴마크 주둔 독일 군대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부대가 가택수색을 하기 위해 독일로부터 당도했다. 마지막 순간에 베스트는 그들에게 아파트 안으로 쳐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덴마크 군대가 개입할 것이고, 그러므로 그들은 덴마크인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문을 연 유대인만 체포할 수 있었다. 전체 7800명 이상 가운데 집에 있다가 그들을 들어오게 하여 체포된 자는 정확히 477명이었다.”



477명의 유대인들이 어떻게 문을 열어주었는지에 대한 정황은 알 길이 없다. 이들은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됐을 것이다. 테레지엔슈타트는 특권층 유대인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이곳에 수용된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적십자 앞에서 인도적 수용소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수용소가 포화상태가 되자 많은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됐고 학살당했다.


잠들지 못하는 밤 동안 내 머릿속에서 그들은 아무 의심없이 문득 문을 열어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고 독일로 끌려간다. 나중에야 그들은 알게 된다. 자신의 작은 실수가 현재의 끔찍한 상황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뒤늦은 깨달음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책으로 이어졌을 거다.


우울증, 공황장애, ADHD, 경계선 인격장애 등 마음의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실수한다. 실수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실수에 대한 지독한 자책을 겪는다. 자책은 일반적인 수준의 스트레스가 아닌 극심한 자기혐오로 확장된다. 우리에게 자책은 일종의 증상 중 하나로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리고 더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도 많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경악할 만한 일은 아니다. 몸이 아파 쉬다가 전쟁에서 패배한 장군이 있고, 무방비로 적군에 붙잡혀 나라를 잃은 황제도 있다. 무엇보다 불행에 스스로 문을 열어준 사람들도 있다. 실수를 통해 사람을 잃었을 수 있다. 좀 더 심각하게는 인생의 경로가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니다. 아직 결정적으로 실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있고 활동하는 것들은 언제나 실수를 한다. 그러니 자신이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면 역사 속의 인물들을 생각하자. 적어도 우리는 그들보다는 나은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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