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일할 수 있을까?
세 딸 중 둘째로 태어난 탓일까. 어릴 때부터 유독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나만 방이 없어 거실에서 잠을 자고, 헌 옷을 입고, 손때 묻은 책을 본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 자매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작은 키만큼 작은 세상 속에 살았던 그때는 모두가 조금씩은 뺏기고 양보하고 감내하고 산다는 것을 몰랐다.
스물두 살에 프랑스 파리로 교환학생 연수를 갔다. 파리로 출발하기 전 미리 교환학생 커뮤니티에서 룸메이트를 구했다. 우리는 학교 근처 카페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었고 나란히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파리 한인 커뮤니티에서 월세방을 구했다.
그곳은 월세 집이 아니라 월세 방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한 평만 한 공간에 신발장과 부엌, 냉장고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부엌에 서서 왼쪽 문을 열면 화장실 오른쪽 문을 열면 방이었다. 화장실은 쓸데없이 컸고 부엌은 요리를 위한 공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작았다. 방은 침대 두 개가 들어가지 않아 침대 한 개와 책상 두 개가 전부였다. 잘 때는 책상 의자를 안 쪽으로 바짝 붙여놓고 침대 밑에 있는 매트리스를 꺼내야 했다. 룸메이트와 나는 생활용품부터 기분까지 전부 나눠 갖고 살아야 했다.
월세방에 도착한 다음날 룸메이트와 장을 보고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름표 붙이기’였다. 올리브 오일, 식초, 스킨, 밀가루, 파스타면에 꼼꼼하게 내 이름을 붙였다. 선심 쓰듯 룸메이트의 물건에는 그녀의 이름을 붙여줬다. 그 순간, 나는 그 아이의 표정을 이해했어야 했다. 눈치 없던 나는 의기양양하게 여기저기 가압류 빨간딱지 붙이듯 내 것, 네 것을 나누어댔다.
지금 그 표정을 해석해보면 대충 이렇지 않았을까? “야, 너 진짜 웃긴다. 이 좁은 집에서 올리브유까지 각자 나눠쓰자고? 이럴 거면 룸메이트 왜 구했어?” 숨소리마저 공유해야 했던 그 방에서 우리는 4개월 동안 서로를 없는 사람처럼 피해 다녔다. 학기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둘 중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20대까지 모든 선택의 기준은 ‘내 것'인지 아닌지였다. 확실히 내 것이 되지 못할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치열하게 진로 고민을 하던 시절 ‘하고 싶은 일'보다는 ‘될 것 같은 일'을 선택했다. 3학년부터 국문과 부전공을 하며 언어학의 세계에 재미를 느꼈지만 대학원 학비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취업을 하기로 했다. 회사를 고를 때도 가고 싶은 곳보다는 될 만한 곳을 먼저 생각했다.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콧대 높은 회사는 지원하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니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관심 있는 학과가 아닌 점수가 맞을 만한 학과를 골랐다. 그렇게 선택한 외국어 문학이 운 좋게도 적성에 잘 맞았지만 일류가 아닌 이류라는 자격지심을 늘 안고 살았다.
자격지심은 평행이론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온전한 나의 것을 손에 쥐어야 안심이 되었다. 좋아 보이는 것을 힘들게 얻어도 완전한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별로 좋아 보이지 않지만 그럭저럭 쓸 만하다면 확실히 내 것이라고 이름표를 붙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회사는 그런 나의 본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곳이었다. 근로계약서에는 이곳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결과는 전부 다 회사의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다. 동의하지 않으면 입사할 수 없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나에게 대안은 없었다. 재빨리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인사팀 담당자에게 제출했다.
인어공주는 다리를 갖는 대가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었으니 나름 합리적인 거래였다. 나도 월급을 받기로 했으니 ‘내 것'을 영영 얻을 수 없다는 조항쯤은 순순히 응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월급은 영영 가질 수 없는 ‘내 것'들을 상쇄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으니 합리적인 거래가 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쓰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 뭘 그렇게 뺏긴 건데? 하나씩 검열대에 올려보자.
자리: 모니터가 훤히 보이는 복도 자리긴 해도 엄연히 내 자리가 있었다.
역할: 이 일 저 일에서 ‘서브'를 담당하긴 했지만 업무를 배우는 시기라 당연한 역할이었다.
이름 기재: 회사 문서는 주로 팀명이 기재된다. 팀으로서 모두 함께 한 일이 맞다.
인사 고과: 회사의 부름을 받는 핵심 인재는 아니었지만 늘 평균 이상의 인사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내가 잃은 게 도대체 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뺏은 적 없고 아무것도 뺏긴 적이 없는데 20대의 나는 왜 그렇게 회사에서 상실감과 패배감을 느꼈던 걸까?
회사는 조직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위해 공동 작업을 한다. 역할과 자리를 나누어 각각 앉아 팀의 일을 나누어한다. 팀장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공로의 크기를 평가했다. 이상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었다. 회사에서 팀 단위로 회사 일을 한 것뿐이다.
그제야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나' 자신이었다. 회사에서 나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시간은 물론이고 내 마음, 에너지, 삶의 의미, 미래 계획, 인간관계, 점심 메뉴, 표정까지 모두 회사 것이었다. 회사에서 ‘나'는 없었기 때문에 내가 가질 수 있는 ‘내 것'도 없었다.
회사에서 내 것을 만들려면 일단 나부터 되찾아야 했다. 아무리 보고서에 내 이름을 넣고, 팀장으로 승진해 내 팀을 만들고, 내 프로젝트를 기획한다고 해도 '내'가 한 일이어야 내 것이 될 수 있다. '내'가 아닌 '회사 가면을 쓴 직원 아무개'가 한 일은 아무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0년 간의 회사 생활은 '나답게 일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남녀 비율 9:1의 보수적인 제조업 회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매일 상습적인 성희롱에 시달렸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일해도 나는 '직원'이 아니라 '여직원'이었다. 가면을 쓰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버틸 수가 없었다. 회식에서 상사가 어제 남자 친구랑 같이 뭐 했냐, 일주일에 몇 번씩 하냐는 질문을 던질 때조차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한 채로 돌처럼 굳게 앉아서 'ㅡ' 모양의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나 자신이 무능한 바보 같았다. 여기서 나답기는커녕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후 3시에 사람들 눈을 피해 계단실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다른 층 화장실 칸에 들어가 휴대폰을 보는 게 유일한 탈출이었다.
무작정 사직서를 제출하고 부모님 눈을 피해 사무실 대신 독서실에 앉아서 생각했다. "다음 회사는 무조건 여성 비율이 높은 곳으로 가겠어." 두 번째 회사는 팀원 중 남성 비율이 20%도 안 되는 이커머스 마케팅 부서였다. 더 이상 성희롱도 성별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제조업과 다른 이커머스 산업의 역동성도 재미있었다. 이곳에서 10년은 버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회사는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차별과 편견은 종류만 다를 뿐 희미하게 새어 나와 온 대기를 뒤덮는 유해 가스처럼 공기 중에 퍼져있었다.
두 번째 회사는 견고한 직급 체계로 쌓아 올린 성이었다. 연차가 낮은 내가 '나답게 일한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팀장님이 임원실에서 깨지고 돌아오면 새로운 미션이 주어졌다. 이유도 명분도 목적도 알 수 없었지만 그냥 해야 하는 일이었다. 임원의 최근 언행을 분석하며 이 일의 배경과 맥락이 무엇일지 팀원들끼리 모여 앉아 추측할 때면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지며 각자 다른 동물을 떠올리는 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누구 한 명이 임원실에 들어가 지시 사항을 다시 묻고 확인해 보면 되는 간단한 일도 몇 시간 짜리 회의가 되었다.
"왜"를 묻는 사람은 내부의 적이 되었다. 맥락을 모른 채로 머리와 꼬리가 잘린 일의 일부를 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실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작은 실수에도 잘잘못을 따지고 책임을 져야 했다. 나의 일은 주어진 일을 실수 없이 그.대.로. 주어진 시간 안에 해내는 것이었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회사를 찾기 시작했다. 마음이 떠난 즈음 점심시간이 되면 팀원들에게 '점심 약속이 있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근처 카페에 앉아 이력서를 수정했다.
세 번째 회사의 조건은 '수평적인 기업문화'였다. 담당자가 일의 오너십을 가지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너무 오래전에 잃어버려 켜켜이 먼지 쌓인 채로 방치된 '나다움'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기업 중에서는 가장 수평적인 기업문화라고 알려진 세 번째 회사로 이직했다.
이직 후 친구를 만나 새 회사는 어떠냐는 질문을 받으면 늘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편하게 회사 생활할 수 있을까~ 싶어" 그 회사는 유연근무제를 시행해서 한 달에 정해진 근무시간만 일하면 언제 출근하든 언제 퇴근하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업무 강도도 적당했다. 모기업에서 독립한 지 5년이 갓 넘은 신생 계열사여서 90% 직원이 경력직이었다. 모두 다 다른 회사에서 왔기 때문에 선후배 개념 자체가 없었다. 팀원, 파트장, 팀장, 임원의 구분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팀원들 간에는 나이와 직급의 차이가 없었다.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깔끔하게 하고 서로의 업무에 간섭하지 않았다. 산뜻했다. 하루 8시간 안에 모든 일을 처리할 만큼의 일만 주어졌다. 누구도 시키는 일 외의 것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회사가 굴러갔고 아무도 새로운 일을 해보자거나 뭔가를 더 해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한 이곳에서 왜 여전히 가면을 써야 할까. 도대체 뭐가 더 남은 걸까. 겹겹이 둘러썼던 가면을 한 겹씩 한 겹씩 벗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왜 여전히 사무실에 앉아있는 내가 어색하고 답답한 걸까. 어쩌면 사회생활이라는 게 그냥 다 이런 것 아닐까?
방황하는 마음과 남는 체력이 찾은 길은 사이드 프로젝트였다. 퇴근하고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을 운영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 삶과 일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글 쓰는 시간이 좋았다. 사람을 모아 모임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단단'은 회사인 '제갈명'과 다르게 활기가 넘쳤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말을 많이 하고 자주 웃었다. 퇴근 후 '단단'이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수록 회사인 '제갈명'의 시간은 무채색의 정지된 화면처럼 느껴졌다.
퇴근 후 새벽까지 브런치에 글을 쓰고 모임 자료를 만들고, 새로운 프로젝트 제안서를 만들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야... 나 지금 새벽까지 일 하고 있잖아. 그런데 하나도 안 힘들어. 왜 안 힘들지? 회사에서 이렇게 일 시키면 몇 달도 안 돼서 몸이 망가졌을 텐데."
나답게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쓰고, 그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모임을 제안하고 설득하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에 내가 있었다. 내가 없다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일이었다.
퇴근하고 말고 회사에서도 이렇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네 번째 회사를 찾고 싶어졌다. 대기업 경험은 10년 동안 질리도록 해봤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나답게 일해보려고 아등바등 노력하고 이직도 해봤다. 더 이상 대기업에서 답을 찾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스타트업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스타트업이라는 환상에 단단히 빠져있었다. 모든 일이든 처음은 환상으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환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변화는 현실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저 멀리 바람에 펄럭이는 빛나는 깃발을 향해 무모하게 달려갈 때 일어난다. 변화는 환상을 타고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