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일하기 위해 다 드러낼 필요는 없다
글 쓰며 들은 플레이리스트 공유합니다. 들으면서 읽어보시면 더 좋습니다.
[my blue valentine] 바다로 가자
네 번째 회사 면접은 모두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2차 임원 면접에서는 마케팅 그룹 리더와 HR 그룹 리더와 2:1로 이야기했다. 면접을 마무리하면서 HR 리더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단단님, 맞죠? 몇 년 전에 우연히 브런치에서 알게 돼서 글 읽고 있어요. 포트폴리오 보고 반가웠어요."
2초가 채 안 되는 짧은 순간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SNS 계정을 괜히 넣었나? 아니야, 더 이상 회사에서 가면 쓴 이중 생활자가 되지 않기로 했잖아. 퇴근 후 작가로 활동해도 괜찮은 회사에 가고 싶었잖아. 낮에는 회사원, 저녁에는 작가 단단이 뭐 어때서. 요새 스타트업에 이런 사람 한 둘이야? 차라리 잘 됐어. 면접 합격하면 여기가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자. 작가 단단을 존중해준다는 뜻이잖아.
다음 날 근무 중에 메일 알림이 울렸다. 축하합니다, 로 시작하는 메일 제목을 보고 속으로 말했다. 역시 운명이었어, 이 회사. 더 이상 주말에 뭐 했냐는 질문에 "그냥 뭐, 친구 만나고 남편이랑 밥 먹고 놀았죠." 거짓말할 필요 없이 솔직하게 글 쓰고 책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편했다.
네 번째 회사에는 SNS 팔로워 수가 많은 인플루언서, 책을 출간한 작가, 업계에서 유명해 강연을 다니는 직원이 꽤 있었다.
"유튜브 보다가 깜짝 놀랐잖아요, 알고리즘으로 테드 영상이 뜨더라고요."
회의 시간이 종종 이런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맞다, 메리는 브런치 작가잖아요."
메리는 회사에서 사용하는 내 이름이다. 메리로 불리는 것도 어색한데 회사 동료에게 브런치 작가라는 말을 들으니 낯설었다. 낯설지만 새롭고 좋았다.
지난 10년간 회사 생활은 내게서 나를 지우는 과정이었다. 나를 지우면 지울수록 투명해지는 게 아니라 의도치 않은 포장이 덧씌워졌다. 애초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보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남이 시킨 일을 남이 하던 방식대로 했다.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
나답게 일하려면 '나'를 숨기지 않아야 한다고 가면을 벗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되찾아야 일에서 전문성도 지속성도 존재감도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네 번째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면서 목표는 하나였다. 나다울 수 있는 곳,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자.
"메리는 브런치 작가잖아요." 이 말을 들었을 때 어색하면서도 안심이 됐다. 이번 회사에서는 애써서 꾸며내지 않기로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잘 왔어, 돌고 돌아서 이제야 제대로 찾아온 거야.
그런데 왜... 여전히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걸까?
"메리, 다음 주 월요일까지 3일 휴일인데 뭐 할 거예요?"
"뭐, 그냥 비도 오고. 남편이랑 집에서 밥 해 먹고 친구 만나고 그럴 것 같아요."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토요일에는 뉴스레터 콘텐츠 회의가 있고, 일요일에는 밑미 리추얼 줌 미팅이 있고, 그다음 날은 온라인 클래스 소개 페이지를 작성해야 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남편과 밥을 먹긴 하겠지만 친구를 만나거나 편히 쉴 수 있는 일정은 아니었다.
순간 마음 한편이 굳어졌다. 이러지 않으려고 회사를 옮긴 거잖아. 이번 주에 늦은 밤 야근까지 해가며 회사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주말에 외부 프로젝트한다고 말하는 게 뭐 어때서? 회사 규정에 어긋나지도 않은데.
왜일까? 이곳에서 나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거짓말을 했다. 뭔가를 감추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 동료들에게 부모님과의 갈등이나 남편과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모두 공유하지 않듯이 회사 밖에서 하는 일을 낱낱이 공유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억지로 쓴 가면이 아니었다. 같이 일한 지 3개월이 된 우리 사이는 이 정도 거리면 충분했다. 우리는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일하고 대화했던 거다.
그동안 이 자연스러운 거리 조절을 왜 가면이라고 불렀던 걸까? 어쩌면 그 가면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던 나 스스로의 오랜 피해의식이나 트라우마였을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나를 다 보여줬기 때문에 존중받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내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가면 속 민낯을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가면을 썼는데 오히려 그 가면은 쓰지 않았다면 인정받았을지도 모를 '나'를 감추었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의 100%를 다 보여줄 필요는 없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을, 저 사람에게는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둘러싼 상황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회사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공유하지 않는 것처럼, 회사 사람에게도 회사 밖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공유할 필요가 없는 것뿐이다. 이것을 알고 나니 가면이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억압이 아닌 자유로운 조절 도구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사무실 출근을 했다. 팀원들과 점심을 먹으며 서로의 MBTI에 대해 이야기했다. 흔한 직장인 대화였다. 그러다 서로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직업을 매칭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A는 웃는 인상이 밝고 자연스러워요. 호텔리어가 떠올라요."
"하하 그래요? 메리는 음... 정확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랄까? 틀리면 혼날 것 같아요 ㅋㅋ. 약사나 의사 선생님이 생각나요."
정확함을 추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 의심했다.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가면을 쓰지 않은 내 민낯이 남들에게는 딱딱하고 사무적으로 비친다는 게 낯설었다. 가면을 벗고 드러낸 얼굴이 진짜 내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분명 내게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면이 있다. 동시에 한없이 물렁한 모습도 있다. 쉽게 흥분하고 금방 좋아해 버리는 가벼운 모습도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절제된 무표정의 나만 알게 된 걸까?
가면을 쓰지 않기 위해 어깨에 힘을 꽉 주고 애쓰고 있었다. 일부러 꾸며내지 않기 위해, 잘 보이지 않기 위해, 분위기를 띄우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차분하게 감정을 걷어내어 일하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 조용한 모습, 무표정일 때의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는 분위기. 분명 내 모습이 맞긴 하다. 그러나 누구나 조금씩 그런 면이 있다. 혼자 카페에 앉아서 깔깔 웃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을 떠올려보면 이상한 것처럼. 혼자일 때는 차분하지만 사람들과 있을 때 밝고 경쾌하고 수다스러운 모습은 이상할 것 없이 자연스럽다. 누구나 조금씩 그렇다.
그런데 나는 혼자일 때의 내 모습만을 '진짜 나'로 규정해버렸다. 반대로 사람들과 함께일 때 밝고 경쾌하고 수다스러운 나를 '가면을 쓴 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일 때조차 혼자일 때처럼 무표정을 짓고선 필요한 말만 하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 스스로를 억눌렀다.
어린아이는 가면을 쓰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한다. 상대를 버젓이 앞에 두고도 “싫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외모를 지적하는 인신공격을 하기도 한다. 이 아이가 평생 가면을 쓰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럽고 당당한 사회인이 되는 게 아니라 온 몸에 투박한 가시를 붙이고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찔러대다가 결국 스스로도 찔러대는 어른으로 자라지 않을까? 가면은 서로를 위한 보호장비이자 스스로를 위한 갑옷이기도 하다.
가면은 남에게도 나에게도 더 좋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돕는 기특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당장 이해되지 않지만 상대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어서, 상대의 약점을 감춰주기 위해, 돕고 배려하기 위해,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가면을 쓰기도 한다. 이때의 가면은 스스로 선택해서 쓴 나만의 가면이다.
내가 선택해서 쓴 나만의 가면.
어떤 가면을 어떻게, 언제 쓸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가면이 내 것이 맞다면 그 가면 위에도 '나'는 드러난다. 성숙하고 단단하고 유연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