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리추얼 11월 회고
한국에서 K-입시를 거친 어른이라면 누구나 나이만큼 공부한 역사가 있다. 10대에는 대학에 가기 위해, 20대에는 회사에 가기 위해 공부했다. 30대가 되어서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공부해야 했다. 여러 직업을 기웃거리며 체험해보고 해보지 않았던 영역에 발을 디뎌보기도 했다. 매 순간이 낯설고 새로운 배움의 과정이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오래 많이 공부하며 사는 걸까?
올해 3월부터 10개월 넘게 공부 리추얼을 이끌어오면서 그 어느 때보다 <공부>라는 키워드를 삶 안으로 강하게 껴안게 되었다. 매번 새로운 메이트에게서 각자 오랫동안 품어온 공부의 서사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을 찾았다.
자신에게 '진심'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스스로에게 절절할 만큼 진심이다. 그러나 이 진심이 '진짜'가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단계가 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한다고?" 단계다. 진심은 생각=말=행동이 꾸준히 일치할 때, 그 순간이 쌓였을 때 비로소 진짜가 된다.
글 쓰고 싶다, 운동하고 싶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실천하고 그것을 지속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말한다. "저 사람 진심이구나." 시간과 체력, 돈을 쓰지 않으면서 진심을 다할 수는 없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데이트할 시간을 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진심이 아닌 것처럼.
공부 리추얼을 찾아온 메이트는 그런 점에서 스스로에게 진심이다. 더 좋은 삶을 스스로에게 쥐어주겠다는 절절한 마음으로 바쁜 하루의 30분을 뚝 떼어낼 줄 알고, 피곤함에도 맞서 볼 줄 알고, 한 달 커피값을 아껴 투자할 줄 안다.
더 좋은 삶을 살겠다는 갈증이 행동이 되고 쌓이면 더 좋은 삶으로 가게 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더 좋은 삶은 '지금과 다른 삶'이다. 다른 것은 낯설다. 불편하고 힘들다. 그럼에도 그 어색함 속에 스스로를 자꾸만 데려가고 싶어 진다. 그 경험이 결국에는 나를 더 좋은 곳으로 이끌어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다름을 받아들이고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도구가 바로 공부다.
공부를 하다 보면 걸음을 멈추는 때도 온다. 똑같이 시간을 들여도 늘지 않고 제자리인 것 같을 때 빠른 포기가 현명한 것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혜수 님은 11월에 에세이 <전진하는 날도 전진하지 않는 날도>를 필사하는 공부를 했다. 그중 한 구절에서 시선이 멈췄다.
2년 동안 천천히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귀중한 한가로운 시간이다.
그리고 모두가 하는 일을 평범하게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2년 동안이나 성장 속도가 느리면 그만두고 싶지 않았을까? 그렇게 오래 노력해서 얻은 것이 겨우 모두가 하는 일을 평범하게 따라가는 수준이라면 진즉에 그만뒀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저자는 그 과정을 귀중한 한가로운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뛰어남'이 아니라 '평범함'을 내 성장의 결과로 인정해주고 응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 글을 필사한 혜수 님은 그 태도를 흡수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3주간 꼬박꼬박 해 온 나를 보고 "나는 뭐든 시작하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사람이구나! 열정과 끈기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한번 더 깨닫게 되었다.
너무 기특한 마음이라 꼭 기억하고 싶었다. 전진하는 날도 전진하지 않는 날도 "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줄 아는 배포가 있어야 공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구나.
이번 달 나의 공부 주제는 <하루 30분 운전과 영어 공부>였다. 재미있게 즐기는 영어와 달리 운전은 고통스럽게 꾸역꾸역 삼켜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카레이서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필요할 때 남들만큼만 운전하고 싶다는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무서울까.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오랜만에 찾아간 심리 상담실에서 선생님에게 하소연했다.
"운전을 잘하고 싶은 게 아니라요. 그냥 편하게 하고 싶은 거라고요."
운전 경력이 오래된 선생님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하지 못하는데 편안할 수가 있나요? 편안하려면 일단 능숙한 단계를 지나야죠."
그렇다. 모두가 하는 일을 평범하게 따라가는 것은 얕잡아볼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지난한 연습의 시간을 지나 잘하게 되고 익숙해지고 비로소 편안해지는 그 긴 터널을 봐야만 했다. 세상에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쉽거나 별것 아닌 일은 없다. '평범함'은 '뛰어남' 다음의 단계였다. 뛰어나게 잘해야 힘을 쫙 빼고 평범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잘하자! 보다 더 높은 단계가
편하게, 그냥 하자! 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편하게 지속하는 일이었다.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니 전진하는 날도 전진하지 않는 날도 천천히 성장하는 과정을 귀중한 한가로운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뛰어남이 아니라 평범함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공부해야 한다.
기분은 강력하다. 기분이 안 좋으면 평소에 쉽게 하던 일도 한없이 무거운 부담이 된다. 기분이 좋으면 어려워 보이던 일을 산뜻하게 해내기도 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분에 잡아먹히지 않고 내 에너지는 내가 채우고 비울 줄 아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
오래 공부 리추얼을 함께한 성원님은 늘 공부 기록 마지막에 마법의 주문 같은 구절을 남긴다.
내일도 행운과 재물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나와 여러분 모두에게~♡
처음에는 이 반복되는 문장의 위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계절이 지나면서 조금씩 쌓여가는 주문의 힘을 경험했다. 매일 밤마다 내일의 나와 우리에게 행운과 재물과 행복을 비는 에너지는 나의 하루를 기분에 넘겨주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새로 시작되는 내일 하루를 행운과 재물과 행복이 가득하게 스스로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성원님은 아침마다 감사 일기를 쓰기도 한다. 이번 달에는 책 <타이탄의 도구들>에 소개된 감사일기 적는 법을 따라 해 봤다며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이제 성원님에게 감사 일기는 스스로 하루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주도적인 활동이 된 것이다. 내 에너지는 '내가' 채우는 것이다.
10개월 넘게 공부 리추얼 메이커로 활동하면서 <공부>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공부했다. 공부법에 대한 책을 찾아 읽고, 메이트의 공부 기록에서 인사이트를 발견해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내는 훈련을 반복했다. 여기저기서 배운 공부법을 스스로 실천하며 효과적인 공부법을 실험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공부 잘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시험 성적을 높인다는 것이 아니다. 궁극인 목적에 충실하게 <나를 좋은 삶으로 데려가는 공부>를 잘하는 법을 말한다.
[좋은 교재와 선생님]
누구에게나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길을 헤매지 않으려면 좋은 가이드가 필요하다.
[습관/환경 세팅]
대학 입시 공부할 때는 따로 환경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공부하러 학교에 가야 하고, 학교를 마치면 학원에 가거나 숙제를 해야만 했다. 학생 때는 원하든 원하지 않는 공부 환경 속에 놓인다. 어른이 되어 공부를 삶 속에 받아들이려면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재미를 느낄만한 요소를 공부에 결합하거나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영어 공부를 예로 들면 좋아하는 미드를 출퇴근 시간에 자막 없이 보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
[회고/기록/공유]
아무리 좋은 강의를 찾아 듣고 환경을 세팅해도 '재미가 없으면' 지속하기가 어렵다. 공부하는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공부가 삶으로 들어올 수 있다. 우리가 휴대폰에 중독되는 원리를 역이용하면 공부하는 줄 모르게 공부에 몰입할 수 있다.
SNS는 늘 새로운 자극으로 뇌를 흥분시킨다. 이 원리를 어떻게 이용할까?
매일 공부를 하면서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것을 발견해보는 거다. 매일 '나만의 기준으로 중간 회고'를 하고 기록한다. 기록을 하면 머릿속에 떠다니던 경험이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실체로 변한다. 우리가 시각 자극에 얼마나 약한지 생각해보면 이 간단한 '기록'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다. 눈으로 보면 믿게 된다. 그래서 가짜 뉴스에 그렇게 쉽게 속는 거다.
그리고 기록을 외부에 공유한다. 단, 이때 의도적으로 긍정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한다. 날카로운 비판은 잘하는 단계를 넘어선 후에 받아도 늦지 않다. 일단 지속할 마음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칭찬을 무러무럭 먹고 자라야 한다.
리추얼에서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회고/기록/공유를 함께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긍정 피드백'의 중독성이 어마어마하다. 혼자 해도 될 공부를 굳이 모여서 하는 이유다. 그냥 모이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매달 한 시간 반씩 선언 미팅, 회고 미팅을 하고 매일 다른 메이트의 공부 기록까지 살펴본다. 심지어 돈도 낸다! 그런데도 리추얼을 지속하는 메이트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한다.
"같이 하고 있다는 연결감" 때문에 계속하게 된다고.
한 때 진심이 부끄럽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비효율적인 순진함으로 치부되었던 것 같다. 수많은 광고에 '진심'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며 지겨울 정도로 소비된 탓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진심' 앞에서 겸허해진다.
진심을 이르는 감탄사 "아니, 이렇게까지 한다고?"는 한동안 "굳이 뭘 그렇게까지 해?"로 풀이되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만 하는 것이 많았던 시대의 해석이었다. 지금은 해야만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권하는 시대다. 그래서 오히려 길을 잃기도 한다. '하고 싶은 것'이라는 말이 무책임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불안이 커질수록 확실한 것에 마음을 기대고 싶어 진다. 그것이 바로 '진심'이다. 오랫동안 생각=말=행동을 똑같이 쌓아 올리는 사람을 믿고 싶어 진다. 그러니 이제 마음껏 우리의 진심을 드러내며 살아도 좋다.
우리의 진짜 재능은 좋은 삶에 대한 진심 어린 갈증이니까.
https://www.nicetomeetme.kr/rituals/01gf9864n6qebcwr8apq5k6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