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바꾸는 공부 이야기
나는 두려움 수집가다. 나의 예민함과 내향성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고, 두려움은 작은 자극도 크게 받아들이는 민감성에서 비롯되었다. 쪼끄만 일에도 지레 겁을 먹고 호들갑을 떨고 혼비백산 도망가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두려움 수집의 역사가 워낙 길어서 두려움 대상 리스트를 읊자면 브런치 글 한 편으로는 부족하겠지만 서른네 살 먹어서 여전히 두렵다고 말하기 민망한 것 세 가지를 꼽아보자면 운전, 영어, 그리고 동물이다.
10년 전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고 난 후, 혼자 아빠 차를 타고 덜덜 떨며 동네 생활 체육 센터까지 1km를 운전하고 그날로 운전을 포기했다. 그러다 남편이 해외 파견을 가면서 "차를 최소 2주에 한 번은 굴려야 고장이 안 난다."는 말을 듣고 다시 운전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남들은 5회짜리 연수 한 번이면 충분하다던데 나는 5회가 다 끝나고도 도저히 혼자 길 위로 나갈 수가 없어서 5회를 더 받았다.
남편이 해외에서 일하는 2년 반 동안 숙제하듯 주말마다 차를 굴렸다. 동네 마트, 도서관, 카페를 전전하다 아주 가끔 1시간 넘게 운전해 결혼식장에 가기도 했다. 2년 반 동안 매주 운전을 하면 적어도 운전이 무섭지는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습관이 무섭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운전 공포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한두 달이면 익숙해진다는데 주말마다 꼬박꼬박 운전 연습을 해도 두려움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아지기는커녕 여기저기 길바닥 위에서 욕먹고, 내 차 남 차 구분 없이 긁어서 보험금 벌점을 올리다 보니 겁이 갈수록 더 늘어났다. 한 친구가 애써 위로하듯 '서울 시내보다 고속도로가 더 나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세상에... 파주 가는 자유로 한복판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아니 속도가 왜 이렇게 빠른 거야? 더 울면 눈물 닦느라 운전을 못 할까 봐 무서워 애써 울음을 그치려고 틀어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갔던 기억이 난다.
운전을 해야 하는 날이면 전날부터 머리가 지끈거렸고 어떻게든 차를 가지고 갈 수 없는 핑계를 생각해 냈다.
'저 결혼식장은 주차장이 혼잡하다고? 어이쿠 차를 가져갈 수 없겠구나.'
'이 카페는 주변에 주차할 곳이 없네? 그냥 지하철 타고 가야지 뭐.'
그렇게 학습지 미루듯 운전을 미루며 2년 반을 보냈고 남편이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운전대와 멀어졌다. 지금도 가끔 운전을 하기는 한다. 회사에서 짐을 실어와야 할 때, 차가 없이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약속 장소에 가야 할 때 운전대를 잡는다. 그러나 여전히 운전을 해야 하는 일정이 생기면 그날부터 운전하는 날까지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운전 생각에 괴롭고 불안하다.
그런 내가 무려 강원도 홍천까지 무려 팀원들을 태우고 운전을 해서 워크샵을 다녀왔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팀 회의 시간에 리더가 물었다.
"워크샵 장소까지 이동 수단이 부족하네요. 혹시 차 가져오실 분 있나요?" 평소의 운전 실력을 생각한다면 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 안 되는데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와버렸다.
"홍대에서 픽업 가능요." 이 말을 뱉은 나 자신 때문에 어떻게든 집에서 홍천까지 운전을 해서 가게 된 거다. 팀원 4명을 태우고 말이다!
여차저차해서 동선은 이렇게 되었다.
1일 차 오전: 집 - 회사 (홍대-삼성)
1일 차 오후: 회사 - 홍천 리조트
2일 차 오전: 홍천 - 춘천 닭갈비 찍고-회사
2일 차 오후: 회사 - 집 근처 사는 팀원 내려주고 집
뱉어 놓은 말을 거두고 못 하겠다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가 않았다. 포기하거나 하거나 선택지는 둘 중 하나뿐인데 포기를 못 하겠으니 어째... 해야지!
2일간의 운전을 해내기 위한 <한 달간 매일 30분 운전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운전 공부 계획을 짜다가 스스로에게 짜증이 확 났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남들 다 하는 걸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걸까. 그런 내가 너무 답답하고 이런 상황이 싫었다. 운전을 해야 가고 싶은 곳에도 가고 하고 싶은 일도 자유롭게 할 텐데 언제까지 두려움에 갇혀 살아야 하지 싶어서다.
불현듯 곽정은 님의 유튜브 썸네일 <초보탈출 운전특강>을 봤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정은님은 운전대를 잡지 못하는 마음을 학습된 공포,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운전을 하지 않는 순간에는 운전을 하지 않는 시간만큼 공포와 무기력을 키워나갔던 것 같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다 힘들고 어렵지만 꾸역꾸역 하다 보면 언젠가 능숙해지는데, 내가 나 스스로에게 능숙해질 기회를 안 줬던 것 아닐까. 초보인 나에게 누군가 핀잔을 줄 때마다 "어쩌라고 나 초보인데!"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움츠러든 탓에 더 두려움을 키운 것 아닐까.
이번에는 기어코 스스로의 훈련 기회를 박탈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매일 조금씩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다. 모든 것이 그렇듯.
11월 9일
요가원은 연남동 골목길에 위치한 건물이다. 가는 길은 어렵지 않지만 주차 난이도가 최상이다. 건물 앞에 혹시라도 빈자리가 없으면 양쪽으로 차가 주차된 골목을 돌아다니며 주차 자리를 기웃거려야 한다. 저녁에 어두운 연남동 골목을 가기가 겁이 나서 점심시간에 다녀왔다. 확실히 낮은 밝아서 골목 주행에 힘이 덜 들어간다. 남편이 가끔 요가 수업이 끝나면 차를 끌고 데리러 오는데 그때마다 "이런 좁은 골목 운전은 진짜 힘들겠다." 속으로 지레 겁을 먹곤 했다. 낮에 가보니 빠듯한 길인 것은 맞지만 충분히 지나갈 수 있었다.
점심 연습에 용기를 얻어 저녁 요가 수업에 차를 끌고 갔다. 그런데 아뿔싸. 골목은 빽빽하게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주변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댔다. 운동을 마치고 고요한 차 안에서 백예린의 bye bye my blue를 들으며 집으로 왔다. 오늘 미션을 클리어했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후렴을 따라 부르는 짧은 순간이 아쉬울 정도로 좋았다.
그동안 뭐가 무서워서 15분도 안 걸리는 요가원까지 차를 끌고 오지 못한 걸까. 내 안에서 증폭되었던 두려움의 실체를 앞으로 매일매일 만나고 싶다. 내 안에 자라났던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 벌벌 떨 만큼 무서운 존재가 맞긴 한 건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내일은 사무실 출근날. 퇴근하고 잠깐 주차장에서 주차 연습이라도 해야겠다.
11월 10일
오늘은 주차 공부! 케이스를 나누어 봤다.
후면 주차 / 왼쪽에서 들어가기
후면 주차 / 오른쪽에서 들어가기
전면 주차 / 왼쪽에서 들어가기
평행주차 / 오른쪽에 바짝 붙이기
모두 2번씩 반복 연습!!
11월 11일
이마트 왕복 2번
점심시간에 한 번, 퇴근하고 장 보러 한 번.
하루에 같은 장소에 두 번 가니 훨씬 수월하다.
11월 13일
학동역 결혼식장에 다녀왔다. 며칠 간의 특훈으로 자신감이 붙었다.
11월 15일
연희동 드라이브 스루 스타벅스에 다녀왔다. 드라이브 스루 스타벅스는 처음! 차 안에서 주문하고 음료만 받아가려다가 주차 자리도 있길래 1시간 있다 왔다.
11월 16일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요가원을 두 번 왕복했다.
11월 17일
드라이브 스루 스타벅스에 또 갔다. 오늘은 만차여서 음료만 받아서 왔다. 두 번째 길이라 한결 긴장도 덜 되고 편안했다.
11월 18일
퇴근하고 저녁에 이마트에 다녀왔어요. 와인 세일을 왕창 하길래 한 병 사 왔어요. 버터 향이 나는 신기한 와인이었다. 이제 동네 마트 정도는 아무 긴장 없이 운전을 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기특하고 뿌듯하다.
11월 19일
고척동 사는 친구집 다녀오기. 365일 막힌다는 서부간선 도로는 역시나 정체였지만 오히려 천천히 갈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11월 20일
홈플러스 다녀오기.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는데 주차장에 차가 너무 많아서 2번을 뱅뱅 돌았다.
11월 22일
동네에 새로 생긴 디저트 샵에 다녀왔다. 이름도 귀여운 my little mountain! 이제 동네 운전은 정말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매일 조금씩 하는 게 이렇게 강력하구나.
11월 23일
차를 긁었다.
운전 공부할 겸 요가원에 차를 몰고 가려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그 순간 펑-!
차 앞 오른쪽이 주차장 출구 코너에 세게 부딪혔다. 심장이 벌렁벌렁 간이 콩알만 해져서 일단 다시 차를 주차장에 넣고 상황을 봤다. 긁히긴 했지만 워낙 아랫부분이라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에 차를 몰고 요가원에 갔는데 이럴 수가... 주차 자리가 없었다. 근처 유료 주차장에 갈까 고민하다가 오늘 뭔가 더 큰 사고를 칠 것만 같아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마침 기름이 떨어져서 연료 경고등에 불이 들어왔다. 침착하게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도로로 빠져나오는데 쿵-! 아... 오늘 진짜 왜 이럴까! 도로와 연결된 부분이 아니라 보도블록으로 내려간 거다.
덜컹이는 심장과 함께 차체도 왠지 덜컹이는 느낌이었다. 왜지? 바람이 빠졌나? 뭐가 문제가 있다? 덜덜 떨며 집으로 돌아왔다. 운전 실력이 조금씩 늘어간다고 기뻐했는데 일보 후퇴, 아니 백보 후퇴한 기분이다. 다시 운전할 수 있을까. 이번 일로 포기하지 않고 싶다.
11월 25일
그저께 차를 긁고 나서 위축된 마음으로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남편을 옆에 태우고 동네 이마트 가기! 계속 주차장 출입구에서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오늘은 그다지 운전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했다! 하면 는다!
12월 5일
점심시간에 연희동 드라이브 스루 스타벅스 가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사 오기 미션!
한 달째 거의 매일 운전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주차장을 나갈 때, 좁은 길을 지날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나 자신, 좀 답답하다. 그래도 아무 사고 없이 커피 사 와서 장하다 장해!
12월 8일
대망의 워크샵날...! 한 달 동안의 연습으로 운전을 더 잘하게 된 건 아니었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어깨에 힘을 꽉 준 채로 운전대를 잡게 된다. 달라진 게 있다면 "까짓것! 가보자 홍천!"을 외치는 마음이었다. 나보다 어린 팀원들 앞에서 무서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척 운전을 했다. 그래놓고 불안해서 옆자리 동료에게 "제가 내비게이션을 못 보니까 지도 꼭 잘 봐주세요. 꼭요!" 신신당부를 했다.
홍대-삼성-홍천-삼성-수색을 거친 2일간의 운전 대장정은 무사고 안전 귀가로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운전을 좀 더 수월하게 하게 되었냐고? 글쎄... 한 달간 매일 연습했지만 내 두려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한 달 가까이 운전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실망했냐면? 그건 아니다. 사실 아주 크게 나에게 실망할 뻔했는데 그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경험이 있었다. 바로 영어 공부였다.
운전 연습을 시작한 날 함께 시작한 공부가 있었다. 곽정은 님의 유튜브 채널을 보고 이어서 본 콘텐츠가 알로하융 채널의 영어 회화 앱 광고였다. 영어 공부 앱 듀오링고를 며칠 쓰다가 그만둔 기억이 있어서 영어 공부 앱이 뭐 그리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 오? 재밌는 거다. 내친김에 유료 결제도 했다.
매일 운전 연습을 하면서 동시에 영어 공부도 했다. 심지어 그 기간은 일 년 중 가장 바쁜 블랙 프라이데이 시즌이었는데 바쁜 업무 위에 미션을 연속으로 얹은 셈이다. 휘몰아치는 '해야 할 일'의 폭풍에 이미 진입해버려서 벽돌 두어 개 더 얹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 어디 한 번 다 와! 내가 상대해 줄게! 이런 기세였던 것 같다. 그 덕분에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를 마치고 한 달 내내 번아웃을 겪어야 했지만.
영어 공부는 운전과 다르게 재미있었다. 영어도 운전도 능숙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영어는 더 상황이 심각하다. 어쨌든 운전은 "이동"이라는 목표를 완수할 수 있었지만 영어를 매일 조금씩 배운다고 해서 외국인과 프리 토킹이 가능한 것도, 원서를 술술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겉보기에 그럴듯하게 해내는 것은 운전이었는데, 재미를 붙인 건 영어였다. 영어는 매일 아주 조금씩 늘어나는 걸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앱에서 매일 그날 공부를 마치면 내가 말할 수 있는 문장 길이와 내가 들을 수 있는 문장 길이를 업데이트해준다. 매일 1 단어가 늘었다 줄었다 하며 내 실력을 리포트해주는 거다. 그 아래에는 매일 30분 이상 공부하면 달력에 스탬프도 찍어준다. 매일 모이는 스탬프와 늘어나는 단어 수를 보며 뭔가 늘고 있다는 확신이 생기는 거다.
그러나 운전은 잘하는 상태가 되기 전은 아무리 미세하게 성장을 해도 모두 다 "운전 못함" 상태로 분류된다. 아무리 해도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들을 수 있는 단어 수가 12개에서 11개로 줄어든 날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으면서 벽에 차 옆을 긁은 날은 내 실력이 0으로 낙인찍힌 것처럼 좌절했다. 요가원과 마트, 카페를 여러 번 왕복하면서 분명 이전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카페를 갔는데 여전히 운전이 두려웠다. 영어 역시 한 달 넘게 매일 공부해도 여전히 원어민과 프리 토킹이 안 되는 실력이지만 "조금씩 는다는 재미"를 느끼는데 왜 운전은 이렇게 두려울까.
세 번째 두려움 리스트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동물. 어릴 때부터 모든 종류의 동물을 무서워했다. 강아지, 고양이는 당연하고 병아리나 메추리, 앵무새, 곤충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무서웠다. 친구 집에 반려 동물이 있으면 놀러 가지 않았고, 동물원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운전이나 영어는 그냥 안 쓰고 안 하는 사람인 척하고 살 수 있었는데 동물에 대한 두려움은 나이가 들 수록 내보이기 민망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 강아지를 마주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 애써 무섭지 않은 척 동물과 거리를 두고 외면하며 지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요가원에 강아지가 살게 된 거다! 원장님이 어느 날 갑자기 요가원에서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름은 '운'이었다. 요가원을 바꾸기에는 너무 정이 들었고 계속 다니기에는 안 그래도 좁은 요가원 안에서 운이와 마주해야 한다는 게 무서웠다.
결국 더 강한 욕망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요가원에 계속 다니면서 운이와 마주하기로 말이다. 일 년 가까이 운이에게 인사를 하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요가원에 들어서면 재빨리 강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제는 운이가 나의 계속되는 외면에도 굴하지 않고 애정 어린 손길을 갈구한다는 거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매번 나에게 달려와 인사를 하고 내 물건에 관심을 보인다. 원장님이 방심한 사이 강의실까지 들어와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양말을 물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아주 천천히 운이에게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그냥 놔뒀고, 그다음에는 내 손을 잡는 것을 놔뒀고, 어느 날은 요가 매트 위에 누워 있는 운이를 팔로 쓱 밀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 때가 왔다. 그날은 운이가 내 요가 매트 위에서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한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오늘은 나를 만져주지 않으면 꿈쩍도 안 할 거라고. 1년 내내 그 아이를 피해 다녔지만 눈빛으로 하는 말을 읽을 수 있었다. 아주 천천히 배를 만졌다. 물컹한 배를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촉감이 꽤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1년이 걸렸다. 운이의 배를 만지게 되기까지. 동물을 마주하면 소스라치게 놀라 숨던 내가 강아지 배를 만지게 되었다! 운전도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강아지 배 만지는 일 따위는 물 마시듯 아무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1년이 걸린 것처럼. 매일 영어 공부를 하지만 여전히 원서를 술술 읽지 못하는 것처럼.
그냥 아주 오랫동안 어쩔 수 없이 해내는 시간이 아주 많이 쌓여야 했던 거다.
11월부터 쭉 내가 했던 공부는 <두려움에 맞서는 공부>였다. 이제 그 비밀을 알았다.
두려움에 맞서는 공부를 잘 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 잘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가짐
- 어쩔 수 없이 그냥 꾸역꾸역 해내는 시간
- 매일 조금씩 늘려가면서 나아진 스스로를 인정하는 태도
나는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어설픈 운전자 일거다. 영어로 말하고 읽는 것이 어색할 거다. 여전히 운이와 신나게 놀지 못하고 슬쩍 배를 만지는 것에 그칠지도 모른다. 괜찮다. 그냥 그렇게 계속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빼고 운전을 하고 영어를 쓰고 운이와 한바탕 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같이 잘 살아보자, 두려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