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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Mar 09. 2024

지속 가능한 적당함


나는 균형 있는 사람인 걸까 적당하게 안주하는 사람인 걸까.
이 질문에 답하며 보낸 일주일의 기록입니다.



월요일

내가 원하는 성장은 사실...


나는 누군가의 성장 이야기 보는 것을 좋아한다. 성공시대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봤고, 독서실 사물함에는 [16세 소녀 하버드를 쏘다] 비스무리한 제목의 책들이 있었다.



헷갈렸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성장이 무엇인지.



10대에 내가 원한다고 믿었던 것은 [성공]이었다. 텔레비전 속 멋진 커리어 우먼, CEO, 베스트셀러 작가가 롤모델이었다. 경제 성장률이 워낙 높았던 시대라 큰 성공만이 성장이라고 여겨지던 탓도 있다.



20대가 되어 나에게는 성공이라 불릴 만큼의 큰돈을 벌 능력도, 리스크에 올인해 볼 담력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패러다임을 [성장]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20대에 지향했던 성장은 성공과 기울기만 다를 뿐 여전히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돈과 영향력을 갖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30대에 나에게 성장이란, 더 이상 더 많은 돈과 영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게 30대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까지도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가치는 돈으로 교환된다. 숫자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인정받을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연봉은 계속 올라야 하고, 경력이 쌓일수록 그 분야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야 한다. 그 구호에 맞춰서 나 역시 지금까지는 숫자를 올리고 키우며 살았다.



여기에 스멀스멀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성장이라는 게 숫자를 올리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일을 잘한다는 것을 연봉 상승과 인사 평가, 업계 인지도로 증명해야 할까?



지금의 나에게 성장이란, 일을 잘하는 능력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왜 성장을 해야 하지? 왜 일을 잘해야 하지? 그 본질적인 목적이 뭘까?



나에게 그 목적은 [현재의 충만함]이었다. 연봉이 오르지만 언제 이놈의 회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매일 고민한다면, 인지도가 커지지만 일을 하는 매일이 괴롭다면 그게 정말 성장이 맞아?



연봉은 그대로지만 점점 일하는 시간이 기다려진다면? 업계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모르지만 내 일에서의 변화를 조금씩 만들어내는 스스로를 대견해한다면? 나에게 성장은 [숫자의 변화]가 아닌 [내면의 변화]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생각하는 [일을 잘하는 능력]은 숫자로 증명되지도 않고 숫자로 보상받을 수도 없다. 일을 잘하게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진정한 보상은 일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 [효능감], [몰입의 즐거움]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일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회사원으로서 일을 잘하면 좋은 점이 뭘까? 내 방식대로 일할 수 있다. 일을 잘하면 똑같은 일을 해도 더 적은 시간을 들여 더 인정받는 결과물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 더 많은 고민과 훈련의 시간을 통과했겠지만.) 그럼 기분이 좋다. 내가 이 사회에서 쓸모 있다는 효능감이 마구 느껴진다. 일에 대한 고민은 치열하게 하지만 일에 대해 걱정은 크게 하지 않는다. 얼마나 산뜻한가. 깊고 찐득하지만 산뜻한 [일하는 마음].



일을 못하면 돈을 얼마 받는지와 상관없이 출근하는 매일이 지옥일 것이다. 사사건건 내 능력을 의심하는 상사와 그런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버거운 일을 해야 하는 압박감을 떠올려보라.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숫자 이전에 [마음]으로 삶의 질을 결정한다. 사람은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낄 때 삶을 지옥으로 느낀다.



일을 잘하면 든든한 내 자리가 생긴다. [자유]와 [효능감]과 [몰입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일을 잘하는 능력에 대한 보상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그래서 나에게 ”자유와 효능감과 몰입의 즐거움을 더 줄 테니 연봉 낮출 수 있겠어?“라고 묻는다면 ”무슨 소리야? 지금 받는 만큼은 받아야지.“라고 답할 것이다. 그게 30대 내내 나를 괴롭히는 마음이기도 하다. 숫자를 올리고 싶지는 않지만 내릴 마음은 절대 없다는 것.



성장에 대한 글과 영상을 한참 보다가 한동안 쉬기를 반복하고 있다. 딱 지금처럼 살고 싶지만, 지금처럼만이라도 살려면 지금 정도로 노력해서는 어림없다는 말들이 버거워서다. 갖고 있는 것을 절대 놓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손에 쥔 것을 모두 내려놓지 않고 나아가려면 결국 숫자도 챙겨야 하고 이 악물고 달려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뼈아프다.



40대에는 내가 향하는 성장이 조금은 더 가벼워질 수 있을까.




화요일

내 강점인 줄 알았던 [균형]이 알고 보니 [적당주의]였으면 어쩌지?


매달 [윤소정의 생각구독]이라는 성장에 관한 유료 레터를 읽고 있다. 이번 생각구독의 주제는 [딥다이브]였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정말 좋아하면 시키지 않아도 딥다이브하게 된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달리게 된다. 밤을 새우고 주말을 반납하고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어릴 때는 벼락치기나 밤샘공부와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체력이 안 좋아 고작 며칠도 무리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것이었다. 시험 한 달 전부터 계획을 세워 매일 조금씩 반복 암기하고 시험 전날에는 10시에 일찍 잠들었다. 내내 놀다가 일주일 바짝 공부해서 나와 비슷한 성적을 받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부럽지도 않았다. 그 체력을 타고나지 않았으니까.


회사원이 되고 나서 일하는 스타일도 비슷했다. 야근을 하면 소화불량에 두통이 심해 오히려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근무 시간 안에 어떻게든 일을 끝내야 했다. 열정 대신 시스템을 선택했다. 나노 단위로 촘촘한 계획, 효율을 극대화하는 템플릿, 반복하며 점점 업그레이드되는 업무 가이드, 그렇게 12년째 일하다 보니 이제 [기록]과 [시스템]이 내 강점이 되었다.


한동안 그런 스스로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만든 시스템 안에서 산뜻하게 리듬을 타는 게 좋았다. 그런데 종종 의심스럽다. 내 방식이 그냥 적당주의인 거면 어떡하지. 퇴근과 함께 셔터를 내리고 나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내가 롱런할 수 있을까. 네트워킹과 레퍼런스 수집에 능숙한 외향적인 주변 마케터들을 볼 때면 걱정스럽기도 하다.


쇼핑을 즐기지 않는 내가 E커머스 마케터라고 할 수 있을까? 자꾸 휴대폰을 보는 게 싫어서 마케팅 알림을 죄다 꺼두는 내가 최신 마케팅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지난 1년간 코칭을 받으면서 했던 고민도 나의 성장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1년간의 코칭을 마무리하며 코치님은 코칭을 더 받고 싶다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이제 혼자 해봐요. 코칭이 더 필요하지 않아요.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할 힘이 있는 사람이에요. 혼자 해보다가 막히면 다시 오세요."


코치님과 함께 찾은 힌트는 [균형]과 [과정]이었다. 나는 균형과 과정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아무리 좋아하는 게 있어도 균형을 깨뜨리며 달려가지는 않는다. 멋진 결과를 만드는 것보다 의미 있는 과정 안에서 지금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그래서 내 성장은 느리고 비효율적이다. 그런 스스로를 지난 1년간 많이 보듬고 응원해 왔는데 여전히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다.


이번 불안은 어디에서 왔을까? 흔들리는 경제 상황과 함께 흔들리는 회사의 뒤숭숭한 분위기? 이제 주니어가 아닌데 여전히 일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했다는 자각? 아니면 요즘 회사에서 했던 크고 작은 실수들? 아마 이 불안은 평생 나와 함께하겠지. 계속 다시 마주하겠지만 일단 이번 불안을 잘 달래서 보내줘야겠다.


이 글을 쓰던 밤, 내 불안을 건드렸던 문장은 이것이었다.


"자신에 대해서 애매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어쩌면 나의 업을 딥 다이브 하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쓰고 밑미 리추얼 방에 들어가 메이트의 기록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오늘은 어떤 기록이 올라와 있을까, 나는 어떤 댓글로 그 기록을 이어받아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메이트 귀동님의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비현실적인 기대를 버리거나 줄이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인생에서 우리는 완벽한 경력, 완벽한 배우자, 완벽한 자녀, 완벽한 친구를 갖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완벽 추구야말로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어김없이 실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는 기대치를 설정하자. 그럼 다음에 강점을 중심으로 자기 자신을 평가하면서 배운 지식과 그런 기대를 맞추도록 하자."


"누구나 살면서 아슬아슬한 순간을 지난다, 이 순간을 어떻게 슬기롭게 지나갈 것인가. 그땐 고개를 꺾어라. 내가 좋아하고 바라고 행복한 것을 바라보라. 아슬아슬하게 힘든 순간을 이렇게 보내고 나면, 인생의 변곡점이 온다."


기록이 말하는 대로 고개를 꺾어보기로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쟁 같았던 오늘 하루를 보내면서도 좋아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았던 정성 가득한 내 일상을 돌아보자.


나를 위한 건강하고 소박한 밥상.



좋아하는 것을 쓰고 나니 기분이 좋아진다. 내친김에 찐하게 행복했던 주말의 기억도 꺼내본다.


차 마시며 명상하던 토요일 오후

남편과 동네 카페에 나란히 앉아 책 읽던 일요일 오후

밑미 리추얼에서 멋진 분들과 반짝이는 에너지를 나누며 인사 나누던 일요일 밤



나는 좋아하는 것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

왜 일에서는 자신 있게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울까.



수요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어젯밤부터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양자 물리학 책을 읽고 있다. 양자 물리학이라니! 정말 어려운 주제의 책이다.



고백하자면 이 책은 이해하지 않기 위해 읽고 있다. 노벨상을 받은 저명한 물리학자조차도 “아무도 양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인데,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 노력에 깊이 빠지는 것이 너무 좋아서 양자론에 대한 책을 즐겨 읽는다. 우연히 카를로 로벨리라는 양자론을 대중에게 쉬운 언어로 소개하는 학자의 책을 알게 된 후로는 그의 책만 읽는다. 다른 책은 너무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기에도 너무 어려워서.



모두가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읽다 보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였구나." 그런데 모두가 모르고 있는 것을 공부하는 건 내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으니 더 빨리 이해할 필요도 더 잘 이해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을 텐데.



양자론은 나에게 과학이 아닌 예술의 영역 같다. 완벽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지만 책을 읽으며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가설을 세우고 세상에 적용해 본다. 맞고 틀리고 가 없는 실험이라는 게 아주 마음에 든다.



사실 맞고 틀리고는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적어도 나보다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많을 거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걸 너는 몰라!” 적어도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학문은 아니라는 게 좋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에 나의 해석도 가능하다. 틀릴 줄 알면서도 내 해석대로 이해하고 싶다. 그게 나에게는 놀이인 것 같다. 난해한 양자론 책을 읽다 보면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그러다 정말 침대에 누워 잠을 자기도 하고 그리고 다시 일어나 책을 읽는다. 읽을수록 더 모르겠는 양자의 세계에서 노는 기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오늘은 연차 내고 아침 요가도 다녀오고, 동네 맛집 브런치 집에서 샌드위치도 먹고, 단골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새치 염색도 하고. 그러면서 중간중간 양자 이론 속에서 꿈을 꾸면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전날 일기도 못 쓰고 스트레칭과 명상도 못하고 바로 기절하듯 자버렸는데 그렇게 밤을 보내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들고 기분이 안 좋다.



Sound Night, Sound Morning

Sound Morning, Sound Night

Sound Day, Sound Night



정돈된 밤이 정돈된 아침을 만들고

정돈된 아침이 정돈된 밤을 만들고

정돈된 하루가 정돈된 밤을 만든다.



매 순간 스스로를 미세하게 돌보지 않으면 금방 마음도 몸도 균형을 잃어버리곤 한다.



아침에 늦잠을 자고 헐레벌떡 요가원에 가기 위해 마을버스를 탔다. 따뜻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내려오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대체 기분 나쁠 게 뭐 있지? 오늘은 휴가이고 나를 위해 요가를 가고 있잖아. 늦잠 그까짓 거 좀 자면 어때? 그래도 이렇게 제시간에 요가를 가잖아. 기분 나쁘다는 생각을 그만하고 그냥 지금 요가 가는 게 참 좋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



책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다시금 떠올랐다. 내가 실제라고 믿는 모든 것들은 사실 [나]를 통해 해석된 [나의 감각 정보 처리 결과] 일뿐이다. 내가 지금 ”와! 정말 평온한 아침이다! “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모든 풍경은 단번에 바뀐다. 달콤한 햇살, 여유로운 마을버스, 요가원의 다정한 분위기.



그러나 ”와… 연차까지 내놓고 늦잠이라니… 난 정말 구제불능이야. “라고 생각하면 따가운 햇살, 마음 급한데 천천히 달리는 마을버스, 부담스럽게 인사를 주고받는 요가원이 되지 않을까?



이 세상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을 내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게 어쩌면 삶의 본질 아닐까. 삶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이 모든 거대한 질문의 끝에는 ”나는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이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라는 말은, 내게 주어진 환경을 감사로 바라보는 순간 진실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감사일기를 자주자주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



❤︎ 오늘의 감
▪︎ 오버나잇 로스터스에서 씨솔트 초콜릿과 커피 한 모금… 와 정말 황홀했.▪︎ 마음에 쏙 드는 동네 미용실을 찾어.▪︎ 요가를 마치고 샤워하고 책 읽다가 15분 자는 시간 정말 달했어.▪︎ 오늘 하루를 선물 받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해.




금요일

답을 찾았다, 지속 가능한 적당함


답은 의외의 순간에 찾아왔다. 쏟아지는 번갯비같은 업무를 처리하다가 6시 반이 되자 모든 것을 놓아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헐레벌떡 요가원으로 향했다.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이 일이 쏟아져도 주 2회 저녁 요가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루틴이다. 모닝커피의 각성 효과로 하루 종일 두근두근 전력질주로 달리던 몸과 마음을 요가 매트 위에 올려놓고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순간은 터널을 지나가는 것 같다. 일과 삶 사이의 터널, 뜀과 쉼 사이의 다리, 외부 세계와 내면세계의 건널목을 지나가는 순간이다.



요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 적당할 수 있는 거, 그거 능력 아닐까. 신입 사원일 때 적당히 일하는 것과, 3년 차, 10년 차 때 적당히 일하는 것은 모두 다르다. 팀원으로서 만들 수 있는 적당한 성과와 팀장으로서 보여줘야 하는 적당한 성과는 폭, 깊이, 방향이 모두 다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결같이 그저 적당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언제나 적당히 일하기 위해서는 계속 변화하는 적당의 조건을 습득하고 적당의 수준을 맞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탁월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꾸준히 글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 SNS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유명한 마케터는 되지 못했지만 회사에서 내 몫만큼은 해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고민한다. 오픈과 함께 마감되는 인기 리추얼을 운영하는 메이커는 되지 못했지만 2년 넘게 꾸준히 평균 이상의 신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월 천만 원 버는 N잡러나 프리랜서는 되지 못했지만 매월 25일마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매년 연봉이 올랐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하면 되지 않을까? 적당히 말귀 알아듣는 신입사원에서 적당히 1인분을 해내는 대리가 되고 적당히 성과를 내는 팀원으로 이직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적당히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가 되고 적당히 나만의 길을 걸어가는 직업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성장이지 않을까?



꼭 지금 연봉의 두세 배를 벌어야만 할까. 회사 밖에서까지 인정받는 직장인이 되어야만 할까. 당장 회사를 때려치울 만큼 독립적인 능력이 있어야만 할까. 그냥 지금처럼 적당히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적당히 밤에는 글을 쓰고 글을 매개로 답장을 주고받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도 되지 않을까? 꼭 지금의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할까? 그냥 지금의 나로 쭉 가도 괜찮지 않을까. 정말 지금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멀리 나아가야 롱런할 수 있는 걸까?



한 일화가 떠오른다. 밤낮없이 쉬지 않고 고기를 잡는 어부에게 한 노인이 물었다.



[노인] "당신은 왜 그렇게 열심히 고기를 잡습니까?"

[어부] "지금 열심히 일해야 나중에 늙어서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지 않겠어요?"

[노인] "원하는 삶이 무엇인데요?"

[어부] "가족들과 같이 건강하고 맛있는 밥을 함께 먹고, 날 좋은 오후에는 바닷가에 누워서 햇살을 만끽하는 삶이요."

[노인] "그건 지금도 할 수 있잖아요. 해가 지면 더 이상 고기를 잡지 말고 집으로 가세요. 잡은 고기로 가족들과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하세요. 주말에는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지 말고 바닷가에 누워 햇살을 즐기세요."



한때 유행했던 YOLO의 정의를 다시 쓰고 싶다.


삶은 한번뿐이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가 유한하기에 빠르게 끝을 향해 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내가 가야 할 곳이 분명하다면 결국 그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 길 위에서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면 그 시간을 단축하겠다고 과정을 고통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길의 끝에서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평생을 바라보며 걸어왔던 목적지는 바로 그곳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음을.



나를 믿고 인정해 주는 동료들

나와의 대화를 하루의 행복으로 여기는 남편

따뜻하고 안락한 우리 집

내 글을 기다려주는 보이지 않는 독자들 (여러분.. 거기 계시죠? 전 알아요.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이미 그토록 바라던 [성장한 삶]의 달콤함을 맛보고 있다. 무엇을 더 바라야 할까? 그저 지금처럼 계속 적당히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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