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성공하는 제안서 작성법
내 메일함에는 두 개의 폴더가 있다.
멋진 제안서 모음
못난 제안서 모음
종종 강의 요청이나 원고를 청탁하는 제안서를 받는데 메일을 여는 순간 할지 말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안 메일을 가끔 받는 나도 이 정도인데 매일 여러 건의 제안을 받는 유명 작가나 인플루언서는 나보다 더 빠르게 메일의 첫인상만으로 제안을 승낙하고 거절하지 않을까.
회사에서도 업무 특성상 제안서를 쓰기보다는 받는 입장이라 [받는 사람 입장에서의] 멋진 제안서와 못난 제안서의 기준이 생겼다. 그 경험까지 담아서 이번 글에서는 성공을 부르는 제안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다루려고 한다.
1.
간단한 회사와 본인 소개
진행 중인 프로젝트 (제안하고자 하는 업무) 소개와 관련 링크
2.
나의 어떤 콘텐츠를 보고 연락하게 되었는지.
어떤 부분이 담당 프로젝트와 맞다고 생각하는지
3.
해당 프로젝트를 꼭 나와 해야 하는 이유
내가 하면 무엇이 더 좋을 것이라 예상하는지
4.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하게 되는지?
타겟은 누구이고, 몇 명이고, 어떠한 매체를 활용하는지
강연료 또는 원고료가 얼마인지
5.
언제까지 의사결정 회신이 필요한지
위의 항목을 하나씩 살펴보자.
사실 1번은 대개 정성껏 잘 작성해서 보내준다. 회사 이름과 링크만 보내줘도 대충 어떤 회사인지 알 수 있어서 어렵지 않은 항목이다. 신생 플랫폼이라고 해도 이미 베타 서비스를 마친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공유된 링크로 살펴봐도 충분하다. 그러나 간혹 아직 런칭 전인 서비스에서 협업 요청을 할 때 한 줄 정도로 소개를 간단히 하는데, 이렇게 정보가 부족하면 믿을 만한 파트너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아무리 제안 내용이 좋아도 선뜻 승낙하기 어렵고 사실 그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지 않는다.
(못난 제안서 예시)
안녕하세요 저는 차 종합 플랫폼을 기획하고 있는 OOO라고 합니다. 브랜드별로 차를 소개하고 차에대한 테이스팅 리뷰를 진행 하려고 하는데 혹시 리뷰가 가능 하신지요?
아마도 이 경우는 꼭 나와 협업할 필요는 없고 차 관련된 콘텐츠를 올리는 크리에이터라면 누구든 괜찮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바로 리뷰가 가능하냐고 물었을 것이다.
제안서 복붙은 백번 이해한다. 나라도 가능성 있는 여러 명에게 동일한 내용을 보내서 최대한 투입 시간과 노동력을 아끼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다. 취업 준비생 시절 40개 넘는 기업에 지원하면서 그중 70%는 복붙으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작성했다. 복붙은 효율적인 일머리의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놓고 "이거 복붙 제안서에요." 라고 티 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복붙 제안서를 판단하는 방법은 내 이름 대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넣어보는 것이다. 그랬을 때 전혀 어색하지 않다면 바로 [못난 제안서] 태그를 붙인다. 못난 제안서 태그가 달린 제안서 중에는 실제로 복붙이 아닌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게 더 문제다. 복붙이 아닌데도 복붙처럼 보이는 것만큼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이번에는 멋진 제안서로 예시를 가져왔다.
(앞부분 생략)
OO 프로젝트의 인터뷰이를 찾다가 A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루틴과 월간 회고, 일상 영감 수집, 매일 30분 공부, 채소 식단… A님이 이어오신 기록을 보며, 꾸준한 기록으로 삶을 정돈할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거 같아요.
기록의 원동력은 나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온다는 말씀도 어떤 것인지 느껴졌고요!
기록의 습관화를 어려워하는 저를 비롯한 독자들에게, 이렇게 꾸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을 쌓기 위해 거쳤던 시행착오, 그리고 지금 정착한 방법, 현재 개발 중인 기록의 팁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OO 프로젝트에서는 A님이 가지고 있는 기록의 방법에 대해 조금 더 세세하게 여쭤보고 싶어요.
기록이 좋다는 건 많이 들어봤지만, 꾸준히 이어가는 것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사람들에게, 다시 자기만의 기록을 시작해 볼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게 될 경우, A님의 기록 도구들을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 촬영하는 것도 함께 요청드리려고 합니다!
(뒷부분 생략)
이 글은 최근에 한 매체로부터 받은 인터뷰 제안 메일의 일부다. 담당자는 메일을 보내기 전 틀림없이 나의 SNS와 글을 꼼꼼히 살펴봤을 것이다. 하루 루틴, 월간 회고, 일상 영감 수집, 매일 30분 공부, 채소 식단은 내가 일상에서 중요하게 기록하는 주제들인데 이 주제들을 공통으로 다루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사용하는 특정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A에게도 B에게도 보내기 위해 대충 뭉뚱그려 작성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메일은 아마 비슷한 포지셔닝의 크리에이터 B에게는 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 메일에 등장한 생소한 키워드의 조합 때문에 나한테 온 것이 맞는지 의심할 거다.
또 다른 멋진 제안서 예시다.
(앞부분 생략)
단단 님께 제안드리고 싶은 콘텐츠
(가제) 저글링 시스템으로 꾸준히 글 쓰는 법
가제에서 눈치 채셨듯, 단단님의 브런치 글을 보고 이 주제를 제안드려요:)
글을 쓰기 위해 4Step 으로 메모를 정리하시고, 한 번에 하나의 글이 아닌 다양한 글을 조금씩 쓰는 방식이 새롭더라고요!
그리고 '7개 직업을 저글링하는 시스템'이라고 표현하신 것과 노션으로 여러 글을 관리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그중 '저글링하는 시스템'이라는 키워드가 후킹하여 가제에 넣어보았습니다.)
우선, 보통 한 번에 하나의 글을 끝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생각을 뒤집는 관점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이 방법이 단단 님처럼 여러 곳에 기고하거나 사이드프로젝트를 하는 분이 아니어도, 글을 꾸준히 쓰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나 따라 하기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글감 수집부터 완성까지 큰 품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고, 시각적인 예시도 보여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분들도 글쓰기에 관심이 많으셔서 관련 콘텐츠를 많이 좋아해 주시는데요! 연말에 '새해에는 진짜 글 꾸준히 써야지...'하는 생각을 많이 하시기 때문에 12월에 맞춰 발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뒷부분 생략)
이 제안서는 2년 전에 받은 원고 청탁 메일이다. 구체적으로 나의 어떤 콘텐츠를 보고 연락하게 되었는지 명시했으며 그 콘텐츠의 어떤 부분이 자신이 소속된 매체의 독자에게 와닿을지 설명했다.
이제 복붙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못난 제안서 예시를 보자.
저는 A기업 B부서에 근무 중인 OOO라고 합니다.
단단님께서 지금까지 진행해주셨던 활동을 인상깊게 보았기에, 마케팅 전문 교육 플랫폼인 A기업에서 강의 해주시길 바라므로 이렇게 메일 드립니다
이 메일은 보면서 내가 진행했던 활동 무엇을 어떻게 인상 깊게 봤다는 걸까, 보긴 한 걸까? 그냥 인스타그램이나 브런치를 쓱 보고 글은 하나도 안 읽어본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대놓고 "여기 복붙 제안서 있소!" 외치는 사례도 있다.
안녕하세요! 단단 담당자님!
A기업 교육팀 OOO입니다.
저는 국내 최고의 교육 플랫폼 OOO에서 함께할 분들을 발굴하고, 프로젝트 전반에 걸쳐 컨설팅과 디렉팅을 지원하는 프로젝트 디렉터입니다.
OOO 플랫폼의 교육 카테고리는 매달 억대 매출 프로젝트를 내고 있으며 1년새 2배 이상 성장한 A기업 내 1위 성장 카테고리입니다.
(중략)
OOO 플랫폼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링크에 접속하시어 설문폼을 작성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팅에서는 어디에서도 알려드리지 않는, OOO만의 성공 로직과, 팁을 대외비로 알려드립니다.
단단 담당자님이라는 호칭부터 느낌이 왔다. 회사 밖에서는 프리랜서처럼 활동하고 있는 나에게 "담당자님"이라는 호칭은 생소했다. 차라리 "선생님"이라던가 단순하게 "단단님"이라고 했으면 의심이 덜했을 텐데. 이 메일의 복붙 냄새 절정은 마지막 부분이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기껏 메일 초반에 내 이름을 불러놓고 관심 있으신 분들이라니, 아니 이건 너무 성의가 없는 것 아닐까. 그다음 문장에서 자랑하듯 알려준다는 OOO 플랫폼의 성공 로직과 팁이 궁금해지지 않았다.
2번까지 정성껏 고민해서 작성된 제안서라면 대개 이미 마음은 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다. 그럼에도 3번 항목을 꼼꼼히 살펴보는 이유는 이 프로젝트가 단순하게 일회성 부업으로 끝날 것인지,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제안과 기회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지, 내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여러 제안서를 동시에 받은 경우라면 더더욱 3번 항목이 중요해진다. 나의 경험과 이야기가 필요한 자리에 가서 돈을 벌 수 있는 제안 자체로도 감사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서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서로 얻는 게 있는 제안을 선택하는 게 장기적으로 서로에게 좋은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제안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 (예시 1) 기존에 하던 [기록]에 대한 강의 요청인줄 알았는데 추가로 "시간 관리 템플릿"을 이번 기회에 함께 만들어보자는 제안. 이 기회에 새로운 콘텐츠를 발굴하고 향후 다른 강의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 (예시 2)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전문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어준다는 제안. 프로필 사진으로 앞으로 두루 활용할 수 있다.
멋진 제안서 사례를 소개한다.
(앞부분 생략)
OOO는 연사님께 이런 가치를 더해드립니다.
1) OOO는 연사님을 리스펙트 합니다
OOO는 연사님의 콘텐츠와 커리어를 존경하고 존중합니다. OOO의 모든 마케팅 활동은 연사님과 연사님의 콘텐츠에 빛을 더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 많은 멤버가 연사님과 만날 수 있도록 (a) 맞춤 SNS 콘텐츠 발행 및 광고 집행, (b) 뉴스레터와 문자 메시지를 통한 홍보 (c) OOO 홈페이지를 활용한 홍보 등을 진행합니다. 혹시 위와 같은 활동에 있어, 저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2) OOO의 멋진 멤버들로부터 긍정의 에너지를 한껏 받으시게 됩니다.
OOO의 모든 이벤트는 저희가 직접 개발한 전용 웨비나 솔루션으로 진행됩니다. 강연이 진행되는 동안 멤버들은 채팅창을 통해 연사님께 아낌없는 응원과 격려의 메세지를 쏟아냅니다. 또한, 적극적인 질문과 활발한 토론으로 강연에 생기를 더합니다. OOO 이벤트는 일방적인 이벤트라기 보다는 연사님과 멤버분들이 소통하고 연결되는 기회입니다. 연사님께서 에너지와 자부심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뒷부분 생략)
나와의 협업 경험이 상대에게도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도 고려한다. 그래야 다음 기회로 연결될 수 있고 내 입장에서도 상대가 "그냥 일했지 뭐."라고 생각하기보다 뭐라도 남는 경험을 하도록 만들어주고 싶다.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 알고 싶다면 제안자에게 아래의 질문을 묻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참 많은 직장인, 마케터, 크리에이터가 있잖아요. 그중에서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이기에 더 잘할 수 있다고 기대하시는 점은 무엇일까요? 제가 함께하면 담당자님에게는 어떤 도움이 될까요. 제가 그 일을 맡는다면 무엇이 “더” 좋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담당자님과 함께한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떤 경험과 가치, 레퍼런스를 얻을 수 있을까요?
내가 받았던 제안 메일 중에 마음을 흔들며 "아! 이건 꼭 해야겠다."고 결심한 제안이 있었다. 매거진의 한 짧은 꼭지였는데 심지어 원고료도 책정되지 않은 부탁이었지만 제안 메일을 읽으며 이미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메일부터 바로 보자.
(앞부분 생략)
이번 OO매거진 11월호 특집 주제는 '기후위기'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산불이 났고, 올 여름엔 서울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인명 피해가 있기도 했습니다. 위기는 분명한데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무력감을 느끼며 '기후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는 가운데, 저희는 평소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아낌없이 보여주셨던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 분들이 평소 환경을 위해 실천하는 행동에 대하여 여쭙고자 합니다. 지금 내가 당장 오늘부터 따라해볼 수 있는 작은 행동들이 모인다면 무력감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 마음에서 준비한 코너입니다.
현재 작가님을 비롯해, 정세랑 소설가, 최정화 소설가,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초식마녀, <미물일기>를 쓴 진고로호 님 등 환경과 관련된 여러 분야의 콘텐츠를 만들어온 창작자 분들의 답변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OO매거진를 함께 만들고 있는 OOO 편집장도 본 코너에 작가님의 답변이 더해질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잘 부탁드린다고 하시네요.)
코너 명은 [나는 환경을 위해 000 한다] 로, 환경을 위해 실천하는 행동 하나를 꼽고 어떻게 실천하고 계시는지 부연 설명을 전달해주시면 됩니다. 답변을 정돈된 글의 형태로 요청드리는 것은 아니며, 정말 설문지에 답변하시듯 내용을 편안한 형태로 전달해주시면 다양한 창작자들의 다채로운 답변을 에디터가 정리하여 실을 예정입니다.
정말 쉽게 말씀 드리자면, 잡지 속 앙케이트 같은 코너라고 이해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기후위기가 걱정이 되는데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친구에게 "이런 건 어때? 같이 해보자."라고 건네는 작은 팁이라 생각하고 자유롭게 전달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참고로, 본 지면은 앙케이트 형식으로 답변만 받는 코너이다보니 매체에서 별도로 고료가 책정되어 있지 않은 점 정말 송구합니다.
사실 작가님을 모시기에는 너무 작은 코너가 아닌가 하는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매일매일 채소롭게>라는 채소 생활 안내서와도 같은 책을 출간하신 만큼 본 특집에 단독 인터뷰로 모시고 싶다는 마음도 컸고요. 하지만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단단 작가님의 책 부제이기도 했던 '작지만 단단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작은 실천법을 저희 OOO매거진 독자들이 함께 한다면 지구적인 변화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작가님께서 환경을 위해 하시는 행동에 대해 꼭 여쭙고 싶습니다.
작가님께서는 평소에도 사람들과 함께 리추얼을 통해 변화를 만드는 등 우리가 다같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제안하는 일에 탁월하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이번 코너의 취지가 우리 모두 함께 해볼 수 있는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법을 모아보자는 의미인 만큼, 단단 작가님께서 참여해 목소리를 더해주신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뒷부분 생략)
긴 글이라 내 마음이 움직인 포인트를 요약해 보겠다.
1. 내 책 <매일매일 채소롭게>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읽은 게 분명하다. 내 책 다 읽어준 사람만큼 소중한 사람이 없다.
완벽하게 옳고 완벽하게 무해하고 완벽하게 아름답기 위해 나를 잃고 싶지 않다. 나답게 조금씩 천천히. 이리도 가 보고 저리도 가 보면서 나다운 일상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채소로운 일상, 채소로운 매일매일이다.
제안자는 내 책 속 위 문장을 떠올리며 제안서를 보낸 것이다. '작지만 단단한 변화'를 해보자고 책을 낸 나에게 '작지만 단단한 변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달라는 제안만큼 적합한 요청이 있을까.
2. 정말 좋아하는 OO편집장님이 나를 언급했다고? 존경하는 정세랑 소설가님과 같은 지면에 실리는 영광이? 당장 해야지!
3. 워낙 짧은 원고라 30분 정도만 작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렵지 않은데 나를 이렇게 존중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의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없지. 게다가 좋아하는 분들과 연결되는 작업이기도 하고. 내가 이번 특집 코너에 참여한다는 게 '채소 에세이스트'인 내 정체성을 키우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야.
어떤 제안서는 서로 얻는 게 많지 않아도 이성적인 판단보다 감정적인 흥분이 먼저 일어 하겠다고 답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제안서다. 돈을 안 받고도 흔쾌히 승낙하고 싶은 제안서도 있다.
간혹 제안서는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정성껏 잘 작성되었는데 보수(사례비/원고료/강의료)를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충분히 많은 금액이 아니라 결정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까 봐 우선 진행 여부를 결정한 후에 비용을 협의하려는 의도일 텐데, 오히려 나는 비용 이야기를 하지 않는 제안서는 더 이상 진행을 고려하지 않는다.
비용은 중요한 결정 요소 중 하나다. 3번에서 소개한 사례처럼 비용이 없어도 진행하게 된 경우도 있지만, 제안자는 비용이 없음을 솔직하게 먼저 이야기하고 대신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내 입장에서 설명했고 나는 비용이 없다는 결정 요소까지 포함해서 종합적으로 진행 여부를 판단한 것이다.
3번 사례에서 비용 이야기는 쏙 빼고 쟁쟁한 소설가와 같은 지면에 원고가 실린다는 점만 강조해서 써두었다면 뭔가 미심쩍어서 바쁘다는 핑계로 제안을 거절했을 확률이 높다.
내가 제안을 받을 때 고려하는 항목은 투입 자원 대비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충분히 만족스러운지이다.
투입 자원
- 시간 (협의/준비/진행/마무리 전체 과정)
- 해야 할 고민의 깊이
결과물
- 원하는 집단에 내가 알려질 수 있는 기회인가
-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성장할 수 있는가
- 평소에 좋아하던 사람들과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기회인가
-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받는가
저울의 양쪽에 무게를 달아보면서 비교를 해야 결정을 할 수 있는데, 조건 일부가 누락되어 있으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물론, 메일에 회신을 해서 비용을 묻고 누락된 조건을 확인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커뮤니케이션 비용까지 투입 자원에 포함되기에 대개는 비용을 먼저 공개한 제안서 위주로 진행한다.
비용만큼 중요한 정보는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다. 이걸 알아야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 에너지를 써야 할지 판단할 수 있다. 제안 업무의 특성에 맞게 아래 내용이 제안서에 포함되어 있어야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투입해야 할 시간과 에너지를 계산할 수 있다.
강연이라면
언제, 어디서, 몇 시간 동안 진행되는지
타겟은 누구이고, 몇 명인지
사전 리허설 일정이 있는지
인터뷰라면
언제, 어디서, 몇 시간 동안 진행되나요
결과물은 영상, 텍스트, 음성 중 어떤 형태인지
발행 매체와 발행 일자는 어떻게 되는지
발행 전 사전 확인은 어떻게 진행되는?
원고라면
언제까지 어느 정도 분량이 필요한지
글에 어울리는 사진을 추가로 첨부해야 하는지
발행 매체와 발행 일자가 어떻게 되는지
다음은 제안 내용을 구체적으로 잘 명시한 사례다.
** 금액은 민감한 정보라 마스킹처리했지만 실제 메일에는 정확히 명시되어 있었다.
(앞부분 생략)
오늘 이렇게 연락드리게 된 것은, 에세이 한 편을 부탁드리고 싶어서입니다.
OOO에 에세이 코너가 신설됨에 따라 집에서 다양한 홈크리에이티브를 실천하고 개성있는 일상을 영위하는 필진분을 찾고 있습니다.
(예시) 에세이 5편 첨부
지난 4월 리추얼 때, 단단 님의 공부 혹은 저녁 루틴과 관련된 글을 꼭 한 번 언젠가 요청드려보고 싶단 생각을 했는데요. 집에서 꾸준히 행하시는 다채롭고 깊이 있는 일상이 라이프집 회원들에게 정말 멋진 영감이 되어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SNS에 남겨주시는 단편적인 기록만 봐도, 너무 공감되고 존경스러운 지점들이 많았기 때문에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글이 발행되는 7월, 아마 무더위가 한창이겠지요.
바캉스를 즐기러 떠나지 않는 이상 집 안에서 콕 박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 것이고요.
그럴수록 자기 자신을 잘 붙들고 늘 해오던 일상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데요.
'공부' 그리고 '루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준다면 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뿐더러, 저희 '인사이드.zip'의 지면이 몹시 풍요로워질 것 같아요.
[요청 원고]
*분량: 공백 포함 1500~2000자 내외 원고 + 어울리는 사진 1~2장
*마감 기한: 7월 7일 (7월 26일 발행 예정)
*고료: OO만 원 (3.3% 원천징수)
*주제: 무더위에도 놓지 않는 내 저녁 루틴, 퇴근 후 매일 집에서 하는 '공부' 혹은 '루틴'이 만든 일상의 깨달음과 활기, 내향인의 홈 리추얼 '공부+아침저녁 루틴' 등
제가 생각해본 주제는 이 정도이지만, 단단 님이 생각하시기에 더 나은 이야깃거리가 있다면 편히 제안 주셔도 좋습니다. '집에서 행하는 일과 취미'와 관련된 무엇이든 좋습니다.
(뒷부분 생략)
(앞부분 생략)
단단님의 서면 인터뷰는 12/1(목)에 발송할 매거진에 실을 예정이며, 이번 호 주제는 성장(Grow-up) 입니다.
인터뷰 질문은 프리랜서로서의 일하는 사람들의 성장에 맞춰 구성할 예정입니다.
추후 진행 일정에 대해 간략히 안내드리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요청]
1. 인터뷰 주제 : 성장(Grow-up)
2. 형식 : 서면 인터뷰(질문 개수 약 5개 내외)
3. 일정 : 11/11(금) 오전까지 인터뷰 질문 전달
11/17(목)까지 서면 인터뷰 회신 요청 예정
* 일정이 더 필요하신 경우 조정 가능
12/1(목) 매거진 발송
(매거진 발송 전 최종 편집 내용 먼저 전달드릴 예정)
4. 섭외비 : 세전 OO만 원
(뒷부분 생략)
(앞부분 생략)
이번 9월에는 주니어 분들을 대상으로 포트폴리오 작성법 강연을 기획해보고자 하는데요. 제갈명 님과 함께 하고 싶은 강연 제안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래 내용을 확인하시고 바쁘시겠지만 8월 17일 수요일 4시까지 회신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1. 프로그램 일정을 아래와 같이 제안드립니다.
- 날짜 : 9월 20일(화), 21일(수) 중 1일 선택
- 시간 : 8:00 pm - 9:30 pm (소개 10분 / 강연 50분 / 질의응답 30분)
- 장소 : OO 스튜디오
- 방법 : 100% 온라인 라이브 진행 / OO스튜디오에서 라이브로 송출
* 날짜나 시간 등은 연사님이 원하시는 방식에 따라 조율가능하니,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2. 프로그램 주제는 아래와 같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주제(1안): 본업부터 사이드프로젝트까지 연결하는 포트폴리오 만들기 AtoZ
부제(안): 나의 가치와 회사의 니즈를 충족하는 전략적 포트폴리오 작성법
3. 약소하지만 강연료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라이브의 강연료는 OO만원입니다. 콘텐츠의 가치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입니다. 더 빠르게 성장하여 충분한 리워드를 제공할 수 있는 OOO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연사님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뒷부분 생략)
간혹 명확한 데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업무 파트너가 있다. 그 심리를 추측해 보자면 아마도 상대를 독촉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하는 것일 텐데, 그 조심성이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일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일정이 분명 있을 텐데 대충 일정을 얼버무리듯 말하거나 상대방에게 맞추겠다고 말하면 불안하기도 하다. "수상한데, 그래놓고 막판에 가서 시간 없다고 재촉하거나 몰아붙이는 거 아니야?"하는 의심이 든다.
상대에게 맞춰가며 일정 관리를 하다가 마지막에 서두르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명확하게 데드라인을 세분화해서 제시하는 편이 마음이 놓인다. 아직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았으니 제안서에서 명확하게 제시해야 하는 데드라인은 하나뿐이다. 제안 수락 여부를 언제까지 회신해야 하는지 다. 알아서 고민해 보고 답을 주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데드라인이 없는 일은 우선순위가 밀리게 된다. 정확한 날짜를 짚어줘야 상대는 머릿속에 그 날짜를 입력해 두고 계속 생각하게 된다.
다음은 명확하게 일정을 제시한 멋진 제안서 사례다.
(앞부분 생략)
제안드린 내용을 고민해보시고 10월 30일(일)까지 제안 수락 여부와 선택하신 주제를 먼저 답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 전달 드린 내용 중에 설명을 더 원하시거나 궁금하신 부분이 있다면 그 전에 편히 질문 주셔도 됩니다.
수락해주신다면, 기획안 단계를 안내드릴 예정입니다.
(뒷부분 생략)
지금까지 내가 받은 감사한 제안 메일을 하나하나 파헤쳐보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마치 제안서를 점수를 매기는 냉정한 심사위원 같지만 사실 제안서 메일을 받으면 가장 먼저 드는 마음은 감사함이다. 유명하지도 않고 업계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힌 직업인도 아닌 나에게 나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안을 준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멋진 제안서]와 [못난 제안서]를 나눠본 이유는 내가 받은 제안서를 통해 나 스스로도 배우기 위해서다. 직접적으로 제안서를 쓸 일은 업무 특성상 많지 않지만 따지고 보면 일이라는 건 누군가에게 제안하는 것이다. 마케터는 소비자에게 물건을 사라고 제안하고, 교육 담당자는 내부 직원에게 교육을 듣고 변화를 만들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모든 팀원들은 팀장에게 기획안을 만들어서 제안하고, 팀장은 팀원들에게 이렇게 일을 하자고 제안한다. 우리 모두는 일터에서 매 순간 제안서를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에게 도착한 다양한 제안서를 보면서 일터에서 나는 어떻게 제안하고 설득해야 할지 배웠다.
- 먼저 상대가 하는 일을 잘 살펴보고
- 나의 제안이 서로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상대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명확하게 전달하고
- 언제까지 회신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제 한 가지 예외 사항에 대해 말해야겠다. 놀랍게도 때로는 이 원칙들이 모두 지켜지지 않았는데도 "그냥 같이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제안이 있다. 바로 그 제안자를 신뢰하고 좋아하게 된 경우다.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 경우도 있지만 전혀 몰랐던 사이에도 가능한 일이다.
경기도의 한 동네 책방에서 강의 문의를 받았던 적이 있다. 인스타그램 DM으로 짧은 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세요. 단단 작가님
저는 OO의 책방 OOO의 OOO입니다.
저서 [매일매일 채소롭게]로 작가와의 만남(낭독회)을 제안 드리고 싶어 이렇게 글로 먼저 연락을 드립니다.
평소의 나라면 메일이 아닌 DM으로,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이 제안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별로겠지 하는 생각으로 책방 인스타그램 계정을 눌러보았다. 그런데 의외였다. 작은 책방이지만 정성스럽게 공간을 꾸미고, 손님들과 다정한 관계를 이어나가려 마음을 쏟는 모습이 계정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 분에게는 인스타그램 계정 자체가 제안서이자 소개서였던 셈이다. 이런 분이라면 한 번 믿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내 쪽에서 제안서 템플릿을 보내며 해당 양식에 맞추어 메일을 달라고 답장했다.
답장이 늦어지자 제안서 템플릿을 보낸 게 무례한 행동이었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며칠 후 내 템플릿에 충실하게 맞추어 작성된 제안 메일이 도착했다. 이런 제안을 해보는 것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며 문서 프로그램 활용이 낯설어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이야기와 함께.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그 정성스러운 마음을 메일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조금 부족해도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면 그 태도는 전해진다. 오히려 그 부족함을 내가 도와서 채워주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그래서 히스토리와 레퍼런스가 중요하다.
요즘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히스토리와 레퍼런스, 포트폴리오는 SNS다. SNS를 보면 이 사람이 평소에 업무 파트너를 어떻게 대하는 사람인지, 주변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공간인 SNS를 의도적으로 꾸밀 필요는 없지만 퍼스널 브랜딩이 중요한 프리랜서나 스몰 브랜드를 운영하는 경우라면 SNS를 잘 가꾸는 것만으로도 힘을 덜 들이고 협업을 할 수 있다.
직장인이라면 동료의 평판이 곧 히스토리이자 레퍼런스다. 이 역시 평판을 위해 인위적인 가면을 쓰고 지내라는 말이 아니다.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여러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 가장 큰 무기는 평소에 동료들과 일에서 쌓아둔 신뢰 관계다. 꼭 퇴근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친구처럼 지낼 필요도 없고 네트워킹 파티에 다닐 필요도 없다. 지금 함께 일하는 동료를 존중하고 같이 좋은 성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만으로도 충분하다. 뭐,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그런 귀한 태도를 가진 동료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지 않은가.
자, 이제 이 긴 이야기를 끝맺을 때가 되었다. 그동안 회사 밖에서 여러 활동을 하며 받았던 제안서를 살펴보며 [성공하는 제안서의 구성 요소]에 대해 살펴보았다. 긴 이야기를 읽어준 모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내용을 담은 제안서 양식을 나눈다.
이 양식은 빈칸이 많지만 마음이 가는 제안서를 보내주신 분들께 드리는 [단단에게 업무 제안하기] 템플릿이다.
단단에게 업무 제안하기 템플릿
https://longing-coreopsis-f2c.notion.site/bdd71d90212642f3996d502aa6fda44b
**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