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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n 14. 2024

일기에는 무엇을 써야 할까?


일기로 무엇이 바뀌었나


3년 넘게 일기를 쓰면서 가장 뿌듯한 변화는 나에 대한 장기 빅데이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루 - 한 달 - 계절 - 1년]이라는 반복되는 시간을 기준으로 나의 에너지와 생각 패턴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기억력은 불완전해서 객관적인 사실을 시간 순서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렬한 기억, 가장 최근의 기억을 중심으로 기억을 저장하고 인출한다. 그리고 대개 강렬한 기억이란 부정적인 기억일 확률이 높다. 숲 속에서 사냥을 하며 살던 옛 인류는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예민하게 감각하도록 진화했고 두려움 덕분에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기를 쓰기 전에는 요즘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에너지가 없지? 무기력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일기를 쓰면서 반복되는 에너지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는 해야 할 일에 압도되면서 우울함을 느끼고, 밤 10시 반을 기점으로 아침에 그렇게 우울해한 것이 무색할 만큼 후련한 마음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 뒤 시원한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감을 크게 느끼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다. 알면 두렵지 않다. 내 감정을 촘촘하게 알게 되면 감정과 컨디션에 휩쓸리지 않고 하루를 주도적으로 살아낼 수 있다.


감정 패턴을 발견한 이후로 아침 일기와 저녁 일기 템플릿을 만들었다. 아침에는 오늘 하루를 향한 기대와 확신을 일기에 쓴다. 긍정 시각화 명상으로 볼 수도 있다. 전날 잠들기 전에 미리 다음 날 일기 페이지에 질문을 써두고 아침에 일어나면 미리 써둔 질문에 답한다.


아침 일기

[질문] 어떤 하루를 보내고 싶어?
[질문] 그런 하루를 보내면 어떤 기분일 것 같아?


늦잠을 자고 일기를 빼먹고 헐레벌떡 출근한 날은 불안과 걱정으로 조급하게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는 아침에 어떻게든 일기 쓰는 5분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아침 일기를 쓰고 난 후에는 오른쪽 페이지에 저녁 일기 질문을 미리 써둔다. 무엇이든 쉽게 시작하려면 다음에 할 첫 스텝을 미리 해두는 편이 좋다.


저녁 일기

[질문] 원하는 하루를 보냈어?
[질문] 그래도 감사한 일은 뭐야?


일기를 쓰면서 가장 놀랐던 건 아침에 썼던 확언을 90% 이상 성취한다는 거다. 아마도 아침에 일기를 쓰면서 무의식에 그 다짐을 저장해 두는 것 같다. 아침 일기에 "오늘은 편안하게 성취하는 뿌듯함을 만끽하겠어."라고 쓴 날 저녁에는 아침에 써둔 일기를 까먹고 보지 않고서도 비슷하게 "편안하게 성취한 뿌듯한 날"이라고 적곤 했다.


저녁 일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래도" 감사할 일을 찾아서 적는 것이다. 감사 질문 항목을 따로 만들어두지 않으면 저녁 일기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채워지기 쉽다. 


이렇게 매일 쓴 일기는 한 달에 한번 [월간 회고] 백데이터가 된다. 매월 첫 번째 주말 아침이 되면 책상에 앉아 지난 한 달 동안의 일기를 읽는다. 한 달을 촘촘하게 돌아보면서 잘한 것, 성과, 의미 부여할 감정과 사건을 정리한다. 최근에는 나만의 키워드를 지정해서 그 키워드 아래에 일기 내용을 옮겨 적는다.


월간 회고 키워드  

- 회사 생활
- 회사 밖 활동
- 휴식
- 매일매일 채소롭게
- 공부
- 기록
- 밑미 리추얼
- 감사 문장


월간 회고를 쓰기 시작하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그동안 내가 [순간의 기분과 컨디션]을 [나]와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 컨디션이 나쁘고 우울감이 들면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고 규정해 버리고 우울한 과거 경험과 기억들을 불러일으켜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나 스토리텔링]을 우울하게 만들어버린다. 일기를 쓰고 한 달 단위로 회고하면서 한 달 안에는 컨디션이 좋았던 날, 동료와 함께해서 감사한 순간, 뭘 해도 에너지가 없는 날이 모두 공존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OO 한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OO 한 날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열심히 지난달 일기에 밑줄을 긋고 옮겨 적는다.


기록은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아 두는 도구다. 상처로 왜곡된 무의식은 부정적인 기억 위주로 저장하고 인출한다. 기록은 의식적으로 나를 객관화하는 작업이다. 무의식에 휘둘리지 않고 기록하고 자꾸 들여다보면서 무의식에게 알려주는 거다. "지난 한 달 동안 기분 좋은 날도 꽤 있었어. 나를 우울하고 에너지 없는 사람으로 해석하지 마."


일기 쓰기는 내 일상의 편집권을 스스로 되찾는 주도적인 행위다. 내가 갖지 못한 좋아 보이는 것들을 쫓아다니지 않고 내 안의 좋은 것을 발견해서 꺼내쓸 수 있게 해 준다.




일기는 데스노트가 아닌 드림보드


SNS에 일기 루틴을 자주 올리다 보니 일기 쓰기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중 가장 가주 받는 질문이 "분명 나만 보는 일기인데도 자꾸 자기 검열을 하게 돼요. 좋은 것만 적어야 할 것 같고요." 일기는 온전히 나를 위해 쓰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스스로 솔직해져야 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것도 좋다. 하지만 지나치게 끌려가서는 안 된다. 


일기 쓰는 법은 다양하다. 줄리아 카메론의 유명한 모닝 페이지 작성 법은 20분 동안 떠오르는 대로 쓰라고 권한다. 내 방식은 조금 다르다. 스스로 불완전하고 별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계속 그 이야기만 반복해서 적을 필요가 있을까? 일기는 내 삶에 대한 주도권과 편집권을 되찾는 선언적인 행위다. 부정적인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무의식에 끌려갈 필요는 없다. 일기의 목적이 나의 나쁜 모습을 디깅하기 위함은 아니다. 내 안의 부정적인 면, 긍정적인 면을 모두 발견해서 균형을 맞추는 데 있다.


일기에 템플릿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일기는 나만 보는 기록이지만 [의도]를 가지고 써야 한다. 여러 번 템플릿이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는 항목은 [아침 확언] [저녁 감사]다. 아침에 나의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기대감을 담아 선언하고, 저녁에는 하루 동안의 성취와 실패를 오롯이 껴안은 채로 그럼에도 감사한 일을 적어야 내 삶의 의미를 의식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솔직해지고 싶은 마음의 근원이 무엇일까? 결국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일기를 데스노트로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과 내 상황을 저주하거나 일기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습관을 들이면 자꾸만 부정적인 감정, 억울함과 화만 습관적으로 떠오르고 무의식에 그 패턴이 고착화된다. 적당히 솔직해지고 적당히 인위적일 필요가 있다. 일기장에 거짓말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나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일기는 드림보드다. 우리는 하루에 5~7만 가지 생각을 한다. 이 모든 생각을 다 적을 셈인가? 아니다. 그중에서 가치 있는 생각을 선별해서 오늘의 나, 내일의 나를 위해 남기는 게 일기다. AI시대에 왜 굳이 속기사가 되려고 하는가. 우리는 우리를 100%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잘 활용할 수 있다. 아침저녁으로 일기를 쓰며 일기의 [의도]를 되새긴다. 일기는 오늘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내일을 잘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쓰는 것이다. 일기는 꿈꾸고 바라는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그 모습에 조금씩 가까워지려는 노력이다. 




좋은 생각은 백지가 아니라 빈칸에서 나온다


일기를 쓰다 보면 나의 의도에 맞게 자연스럽게 나만의 템플릿이 생긴다. 불렛 저널이 인기인 것도 나만의 템플릿을 만들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본다. (불렛 저널은 선노트와 백지노트 사이의 정체성을 가진 점이 그려진 노트다. 선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원하는 템플릿을 구성할 수 있다. 동시에 선은 없지만 백지는 아니고 모눈종이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점이 찍혀 있다. 점을 기준으로 깔끔하게 선을 긋고 박스를 그려서 템플릿을 만들 수 있다.) 불렛 저널을 며칠 시도했다가 매번 템플릿을 손으로 그려야 한다는 점이 불편했다. 


최소한의 노동으로 템플릿을 구성하고 싶었다. 아래에는 일기 템플릿 변화 과정이다. 6개월 정도 단위로 일기 템플릿이 바뀌었는데 책을 읽다가 영감을 받아서 책에서 배운 삶의 방식을 적용했다. 과거의 일기장을 펼치면 내가 그 시절 어떤 생각에 푹 빠져있었는지 템플릿만 봐도 알 수 있다.



2022년 5월~11월

곽정은님 일기 템플릿 차용. 아직 듬성듬성 일기 빼먹는 날이 많았다.

< 아침 >
오늘 하루 경험하게 될 일 상상하기  
어렵지만 배울만한 일이 무엇인지?
지난번에는 실패했지만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을 하는 방법 중심의 생각 정리

< 낮/저녁 >
중간 중간 내 기분 기록하기

< 밤 >
오늘 하루 있었던 일 복기  
사소한 좋았던 일
감사할 만한 일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내일 해야 할 일 리스트업


2022년 12월 ~ 2023년 4월

마인드맵에 푹 빠져있던 시기. 마인드맵으로 하루 감정과 경험을 키워드 형식으로 기재했다.

[아침] 오늘 하루는 OOO이 있을 거야.
[저녁] 오늘 하루는 OOO가 있었다.


2023년 5월 ~ 2023년 7월

확언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내 삶에도 확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침을 확언으로 시작했다.

오늘의 확언
성취 [관계] [공부] [일]
즐거움
감사


2023년 8월 ~ 2024년 1월

스스로 믿지 않는 확언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확언을 기대로 바꾸었다.

오늘의 기대
하루의 감정
성취와 감사


2024년 2월 ~ 지금

스스로에게 다정하게 말을 거는 질문으로 형식을 바꾸었다. 나를 인터뷰하는 느낌이랄까.
스티커도 붙이기 시작했다. 커피, 화분, 책, 빵과 같은 일상 생활을 표현하는 스티커를 붙이면서 하루를 사랑스럽게 시각화하는 기분이다.



육아일기를 쓴다는 기분으로


나를 관찰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특정한 기준으로 나의 변화를 기록해야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체감하기 쉽다. 예시로 나는 건강한 수면이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 수면 습관을 매일 일기장 맨 위에 적는다. [전날 잠든 시간] - [일어난 시간] - [피로감과 컨디션]을 매일 적다 보면 수면시간과 컨디션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일기가 자꾸만 할 일 목록으로 바뀌어서 그만둔다는 분들이 종종 있다. 만약 일기가 투두리스트가 되는 분들이라면 [나를 인터뷰한다]고 생각하고 나를 위한 질문을 만들어보자. 오늘 나의 하루는 어땠으면 하는지, 오늘 하루를 보내며 무엇이 힘들었는지, 힘들지만 배운 것은 없었는지, 그럼에도 감사할 만한 일들이 있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제3자의 시선으로 나의 하루를 그려보고 돌아보자. 우리는 의외로 자신에게 엄격하다. 권위자나 다수에게 인정받아야 비로소 스스로를 칭찬하게 된다. 어제와 같은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보낸 것만으로도 촘촘하게 노력하고 애썼는데 그런 나의 수고로움을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는다. 왜 옆 자리 동료에게는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면서 나 스스로에게는 실수하면 안 된다고 몰아세우는건가. 아무도 몰라줘도 나는 나의 수고로움을 알아주어야 한다. 그 첫 걸음이 일기다.


나를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기댈 수 있는 보호자이자, 지켜줘야 할 자녀라고 생각해 보자. 그런 나를 키우며 육아일기를 쓴다는 기분으로 일기를 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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