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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n 21. 2024

이번 퇴사는 도망이 아니라 도전이야


나는 지금 너에게 가고 있어


12년 차 직장인,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의 커리어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도 막막하고, 매일 출근하는 삶을 더 해야 한다는 것도 괴롭고, 그렇지만 회사 말고는 먹고 살 방법이 없는 내 삶이 너무 답답했다. 매년 봄이면 찾아오는 주기적인 커리어 고민인 걸까. 때마침 인스타그램에서 커리어 강의 광고가 계속 뜨길래 이거라도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신청을 했다.


"2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 끝점으로 가는 과정인 지금의 회사, 지금의 일 안에서 20년 후의 나에게 필요한 재료가 있는지 찾아보세요."


온라인 강의 첫 영상에서 코치님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답을 써내려갔다.


20년 후면 56살이네. 앞으로 회사 생활을 20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악몽처럼 느껴지지만 56살이 되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나를 상상하는 것은 더 싫다. 요즘 56살이면 커리어에서 정말 황금기 아닌가. 56살이라면 30년 넘게 일하며 배운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나만의 이야기를 전하며 내 세계를 확장해 나갈 본격적인 시기다.


좀 더 구체적으로 56살의 내 삶을 그려보자. 소규모 그룹으로 일과 삶에 대한 마음을 공부하고 배운 것을 삶에서 적용하고 기록하고 나누는 커뮤니티를 이끌고 있다.


그 모습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36살인 지금 내 삶에서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나는 12년 차 평범한 회사원이고 회사에서 겪을 수 있는 이런저런 힘듦을 경험하고 있다. 36살의 나는 지금의 회사 생활도 버겁고 힘들지만 56살의 내가 보기에는 좀 더 힘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게 다 내가 커뮤니티를 이끌어나가는 데 자산이 될 것이다.


필요하다면 30대에 안식년을 가져봐도 괜찮을 것 같다. 조직 안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조직 밖에서 보는 경험도 56살의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을까. 27살 때 6개월의 안식월을 가진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재취업이 안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불안과 조급함, 우울로 그 시간을 그냥 날려버렸다. 37살에 두 번째 안식년을 갖고 싶은데 27살의 나로 돌아가 다시 그 시간을 우울로 흘려보낼까 봐 두렵다. 10년 동안 내가 쌓은 내공이 이것뿐인가 자책하고 싶기도 하고.


다시 56살의 내 시선으로 나를 본다. 피식, 웃음이 난다. 그게 뭐라고 그냥 배짱 두둑하게 쉬고 싶으면 쉬고! 그러다 다시 달리고 싶으면 달리면 되지. 돈은 원래 늘 없는 거고, 불안은 손에 뭔가를 쥘수록 커지는 법. 없음 안에서 넉넉하지 못하면 있어도 누리지 못한다.


56살의 나는 마음이 여유롭고 유쾌하다. 실없는 농담으로 주변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줄 줄도 알고 주변 사람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내 시간과 돈을 기꺼이 그들에게 쏟을 줄도 안다. 나는 사랑받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랑을 주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일임을, 나를 사랑하게 되면 타인의 사랑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56살의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한다. 현실감과 상상력이 넘치는 작가이며, 마음공부 커뮤니티를 이끄는 리더이며, 단순하고 명쾌하게 일을 완성시키는 로지컬 씽킹 강사이다. 나는 언제나 영감 넘치고 세상을 향해 열려있으며 두려움보다 기대감을 먼저 갖는 사람이다.


이 끝점에 가기 위해 지금의 나에게 어떤 도구가 주어진 걸까? 회사 생활, 밑미 커뮤니티, 글쓰기와 기록 습관. 뭐야, 너무 잘하고 있잖아? 이 모든 일을 품기에 지금의 내 그릇은 너무 작고 구멍이 많다. 하지만 이 저글링이 56살의 나에게는 고군분투 씨름이 아닌 한바탕 재미있는 춤사위가 되지 않을까?


56살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지금 너에게 가고 있어. 네가 갖고 있는 자연스러움, 편안함, 여유로움, 즐거움을 아무 걱정 없이 누려도 돼. 너에게 그걸 주기 위해 지금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 너는 그것들을 다 누릴 자격이 있어.




또 도망치는 걸까 봐 두려워


요즘 회사들이 다 그렇겠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도 분위기가 안 좋다. 코로나가 끝나기 무섭게 금리 인상으로 투자 심리가 위축되면서 성장은 사치고, 당장의 생존이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주변 지인들로부터 구조조정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공식적인 구조조정은 없었지만 위기감이 빠르게 감돌기 시작했다. 일을 위한 일이 아니라 진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직을 했고 코로나의 보호막(?) 안에서 얼마간은 힙한 IT 플랫폼 회사에서 일하며 새로운 조직 문화를 경험하는 재미를 만끽하며 일했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었다. 내가 떠나온 대기업 조직들과 다를 바 없어진 경직된 조직 문화 속에서 구성원들은 지쳐갔고 예민해졌다. 일을 위한 일이 늘어나고, 조직 간의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높아지고, 상사의 지시에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네네네... 대답하게 되었다.


나의 방황은 단지 그런 외부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를 잘 버텨내면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침저녁으로 명상을 하고 일기를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운동을 했다. 일상을 잘 관리해서 이 시기를 넘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노력에도 내 마음은 너무 괜찮지 않았다.


처음에는 번아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다 하기 싫고, 놓아버리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다 책 [실패는 나침반이다]를 읽다가 갑자기 안식년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훅 꽂혔다. '그래! 어쩌면 나한테 필요한 건 잠깐 쉬어가는 건지도 몰라.' 안식년을 권하는 책이 아니었는데 스쳐 지나가듯 등장한 안식년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서 갑자기 안식년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안 쉬고 회사 생활을 했으니까 잠깐 쉬는 것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충분히 몇 달 쉬고 나서 어디 나 하나 들어갈 회사가 없겠어? 이런 생각으로 안식년 프로젝트 템플릿을 노션에 만들었다.


템플릿 틀을 만들어 두고 고민을 이어갔다.


"정말 쉬는 게 답일까?"

"돈을 안 버는 기간의 불안감을 견딜 수 있을까?"

"뭐 하면서 쉬어야 하지?"

"쉬는 기간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해야 하지?"

"남편한테는 뭐라고 하지? 명절에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하지?"


"못 버텨서 도망치는 거면 버텨야 하는 거 아니야? 도망이 습관이 되면 어떡해."


고민만 하고 있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템플릿 항목을 하나하나 채워가며 계속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서점에서 또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진짜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사는 법]. 이 책 제목을 보자마자 갑자기 화가 확 치밀어 올랐다.


"아니,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사는 거 누가 몰라서 안 해? 자본주의 사회에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하려면 돈을 벌어야 할 거 아냐!"

"좋아하는 거, 잘하는 거 그런 거 고민할 시간에 그냥 할 수 있는 거 하라며! 그렇게 12년을 보냈어! 그런데 아직도 할 수 있는 것만 하면서 버티는 삶밖에 나한테 주어진 게 없잖아. 이게 맞아?"

"진짜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사는 삶이 어떻게 가능해? 이렇게 자극적으로 책 제목 쓰면서 사람들 현혹하는 거 진짜 너무 싫어!"


그리고는...? 그 책을 샀다. 그것도 심지어 집에 오자마자 당장 읽고 싶어서 전자책으로 사버렸다. 책은 역시나 허무하게도 진짜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사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그 숙제를 떠밀며 질문을 던졌다.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66개의 질문이 있는 책이었다. 또 벌컥 화가 났지만 결국 답을 해야 하는 것도, 선택을 해야 하는 것도 나라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66개의 질문에 답을 해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진짜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기 위한 나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가 퇴사일지, 롱런하는 직장인일지, N잡러일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기간 동안에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좋아 보이는 것들을 뒤따라 사는 인생은 이제 버겁고 지겹다. 명문대, 대기업, 연봉 상승, 그다음은 뭔데? 어느 순간 내가 은퇴 후만 바라보며 산다는 걸 깨달았다.


은퇴하면 교토에서 한 달 살아봐야지, 은퇴하면 마음껏 책 속에 파묻혀야지, 은퇴하면 공부방을 만들어서 마음 맞는 친구를 모아서 같이 공부해야지. 그럼 은퇴하기 전까지 내 삶은 뭘까? 그냥 참고 버티고 기다리는 거?


10대 시절 대학 가면 원하는 거 다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다. 잠이 많은 본성을 억누르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갔다. 잠깐은 즐거웠다. 어디 가서 "저 연세대 다녀요." 이야기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으니까. 그것도 잠깐, 나는 "해야 하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서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법을 몰랐다.


또다시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대기업 가면 원하는 삶이 나타날 거야. 그리고 또 그 쳇바퀴 속에 나를 집어넣었다. 영어 점수를 높이고, 자격증을 따고, 스프레드 시트에 취업 계획표를 만들었다. 인터넷에서 국내 대기업 재계 순위 리스트를 다운로드해서 그 순서대로 지원서를 썼다. 그리고 그중에서 나에게 "주어진"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다음은 비슷했다. 더 좋아 보이는 기업으로의 이직. 요즘 좋아 보이는 곳이 어디인지 검색하고, 그곳에 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조사하고, 준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그게 최선이 아닌 차선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나는 차선이 아닌 최선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은 늘 재미없고 지루하고 시시해 보였다. 내가 손에 쥐고 있지 못한 것을 늘 탐냈다. 좋아하지만 차마 용기가 없어 붙들지 못한 것을 무시하면서. 그 선택을 하면 돈 제대로 못 벌 거야, 인정받지 못할 걸, 그만한 재능이 나한테 있기나 해? 글 써서 돈 벌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 뭐라도 됐겠지.


그리고 또다시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다. 너, 회사에서 롱런하면 되게 멋질걸? 리더 되면 뭔가 다른 삶이 주어지지 않을까? 그 경험으로 그토록 쓰고 싶었던 책 쓰고 강연하면 진짜 반짝반짝 빛나지 않을까? 그러니까 버텨. 이번에도 버티면 돼. 그럼 또 뭔가가 주어질 거야.


하늘에서 뭔가가 주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버티는 삶. 나는 내 삶이 그렇게 느껴진다. 5년 더 버티면 잠실 아파트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10년 더 버티면 책 쓸 만한 직장 내공이 생길 것 같아서. 지금 내 마음을 무시하는 삶.


열심히 명상하고 마음 공부하고 상담을 받으면서 지금의 삶에 더 충실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느끼는 [하고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괴리감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해서, 만족하지 못해서, 자꾸만 바깥을 바라봐서 생기는 거라고 믿고 그런 마음이 들수록 더욱더 수련에 집중했다.


이 번아웃은 일을 많이 해서 생긴 번아웃이 아니었다. 내 마음의 소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해야 하는 일, 주어진 일, 좋아 보이는 일에 나를 밀어 넣은 대가였다. 진짜 좋아하는 일만 하고 어떻게 사냐고 그건 철부지 같은 소리라고 코웃음 치며 산 대가. 돌고 돌아 이제야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좋아하는 것만 하고도 잘 살 수 있는데, 내가 그 길을 보지 않는 거라면 어쩌지? 주어진 길만 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길을 내는 삶이 가능하다면 어쩌지? 더 늦기 전에 그 길을 가봐야 하는 것 아닐까.




번아웃은 일을 많이 해서 오는 게 아니야


탐색의 시간을 거치며 여러 콘텐츠를 보고 생각을 정리하던 중 이번에는 [누틸드]라는 조직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작은 조직의 조직 문화를 연구하고 컨설팅하는 곳인데, 조직이 아닌 개인으로서 일하는 방식에 대한 영감도 얻을 수 있었다.


영상을 보다가 번아웃에 대한 주제가 나와서 집중해서 봤다. 누틸드 대표 데이나는 최근 번아웃을 겪었는데,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일을 못해서 번아웃이 왔다고 말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지 못해서 번아웃이 왔다는 그의 말에 와! 이거였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지금의 내 상태였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게 있고, 그게 뭔지도 아는데, 그걸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다른 일만 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더 이상 이렇게는 못 하겠다는 생각을 한 거다. 나 역시 일을 많이 해서 번아웃이 온 게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내 일을 못해서 번아웃이 온 거다. 그럼? 나만의 일을 하면 해결되는 거잖아!!


이 생각에 다다르자, 갑자기 머릿속에서 온갖 폭죽이 터지며 그동안 묵혀왔던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번뜩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 회로가 이렇게 빠르게 돌았던 적이 있었나? 머릿속으로 내가 해야 할 일, 시도할 프로젝트의 구조를 만들고 세부적인 내용까지 휘릭휘릭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걸 받아 적는 손이 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휑하니 구멍이 많았던 안식년 템플릿은 점점 구체적인 내용으로 계획이 채워졌다. [안식년 준비하기]라는 템플릿 이름도 [Dream Year Project]로 바꾸었다. 이건 쉬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일해보기 위한 준비니까.


** 새롭게 채워진 템플릿은 Dream Year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공개 예정


그리고 오늘, 팀 리더에게 나의 결정을 공유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천천히 차분하게 회사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며칠 전 아침이었다. 늘 일어나던 시간에 평소처럼 일어나 아파트 단지 산책을 하러 나갔다. 늘 보던 똑같은 풍경인데 뭔가가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내 삶의 챕터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이랄까.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심장이 쿵쾅쿵쾅 울려댄다.


이번 퇴사는 도망이 아니라, 도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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