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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똑 똑 똑

사물에 대한 나른한 단상

by 진미

#1


서점에 자주 가질 않지만 한 번 가면 양손 가득 잘 들고 오지 못할 정도로 사게 된다.

이건 읽고 싶었던 책, 이건 신간, 이건 표지만 봤었는데 궁금하다. 등의 이유로 무거운지도 모르고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짚어 든다. 그리고 그동안 인터넷과 SNS를 통해 보고 적어두었던 책 제목도 갑자기 훑어본다. 잔뜩 십 여 만원의 책을 들고 끙끙 매며 집으로 돌아온다. 오자마자 쇼핑백을 뜯어 책을 펼쳐 놓은 다음 무엇을 먼저 볼지부터 정하고 책꽂이에 꽂아두는데 그 뒤로 그들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다. 대체 왜 일까?


사랑받지 못하는 나의 책의 셀프포옹


#2


포털 사이트마다 문화 코너가 있다. 그 곳엔 그림과 책 등과 관련한 소식이 올라온다. 유명 작가들이 추천하는 책, 혹은 그들의 서재와 같은 코너 말이다. 관심 있는 작가가 소개한 책 페이지는 핸드폰으로 늘 캡쳐해둔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선 사야 할 도서 목록에 올리기도 하는데 그들은 대부분 고전소설을 꼭 올린다. 어려서 제대로 읽지 못했던 고전소설을 나이 먹어 읽어보려고 하니까 클래식을 잠자기 위해 들었던 것처럼 졸음이 쏟아지는 걸 어떡하지?


#3


서점에서 일을 했었다. 책이 좋아서, 엄밀히 말하면 아마도 책을 모으는 걸 좋아해서와 같은 단순한 이유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정규직 직원으로 2년 간 일했다. 담당서가를 수 차례 갈아 엎어가면서 판매를 올리기 위해 애썼고 책을 찾아주고 고객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 월급을 받는 이유라며 당연한 거라 너스레를 떨기까지 했다. 중고서점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신간이나 절판된 도서를 팔면 누구보다 먼저 구매하기도 했다. 누가 보던 책을 대체 왜 사는지 몰랐던 나는 제 값을 다 주고 사자면 비쌀 수밖에 없는 세트 도서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집은 점점 더 좁아져만 갔다.


#4


책은 책을 감싸고 있는 커버와 그 밑에 광고 문구가 실리는 일명 띠지가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커버를 벗기고 책을 읽고 다 읽으면 커버를 씌워 새 책인양 책꽂이에 꽂아 두었다. 띠지 역시 커버 역할을 할 만큼 1/3 이상 차지하는 것들은 버리지 않고 커버인 양 책을 본 뒤 다시 씌워 둔다. 이제 너무나도 익숙한 버릇이 되어버린 이 행동을 나의 애인도 함께한다. 책에 밑줄을 긋거나 바인딩된 부분을 꾹꾹 눌러 편 자국을 내지도 않는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새 책에서 나는 특유의 종이 냄새가 알싸해서 좋고 새 책처럼 보관하다가 다시 한 번 더 읽게 되면 또 다른 느낌이 생긴다. 아마 그건 시간과 공간이 변하고 내가 조금 달라진 까닭에 다른 문맥이 더 크게 다가오는 그런 거 쯤일텐데 그래도 나는 그렇게 책을 보는 방식이 좋다.


새 옷 입혀주는 게 아니라 있던 옷 벗기고 창피하게 다시 입혀주는 센스




#5


화장실에선 짧은 글들이 목차별로 연관이 없는 책. 커피숍에 갈 때는 사색을 가능케 하는 철학이나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 정도, 나른한 햇볕이 들어오는 주말 낮엔 쉽고 재밌는 소설, 공간과 시간마다 책을 달리 읽는 버릇 때문에 한 권을 다 읽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길다. 어떤 책은 꼭 노트에 필기하듯 적어야 할 내용들도 있으니 책상에서 읽게 되는 책이 또 따로 있다. 그렇게 한 번에 3~4권의 책을 돌려가며 조금씩 읽어대는 이 버릇이 좋은지 안 좋은지 책 전문가가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6


한국인의 독서량이 세계 200위.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이유만을 말할 건 아닌 거 같다. 좋은 책이 많으면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을까 하는 볼멘소리를 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책 참 안 읽는다. 친해지는 게 참 어려운 듯 한 녀석이 바로 책인데 어떻게든 끼고 살아보려고 한다.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직접 눈으로 인상적이게 봤던 장면이 태닝하면서 책을 보는 외국인들의 모습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그러한 장면들이 곧잘 나오는데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선 그런 장면이 잘 없다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독서가 휴식이라는 생각이 적기 때문이다.

나는 책 욕심이 많으니 어느 여행를 가든 한 두권의 책은 꼭 가져간다. 하지만 돌아올 때 펴 보지 못한 책이 대부분이다. 왜냐면 너무 많이 걸어다녀서 진짜로 피곤하기 때문이다. 아, 하루 종일 이렇게 일해서 피곤한 게 우리의 일상인데 정말 피곤해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핑계가 아니라 진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인 독서량을 지적할 게 아니라 노동시간을 줄여주면 딱 아니겠어?!


종이책의 프로포즈를 거절할 순 없겠다.



#7


그래도 읽든 안 읽든 책을 사는 버릇을 도저히 버릴 순 없을 것 같으니까.

난 녀석이랑 평생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