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똑 똑 똑

시계

사물에 대한 나른한 단상(2)

by 진미

#1


손목시계 욕심이 많았다. 몰래 엄마 방에서 엄마가 아끼는 시계를 차고 나가기도 했었다. 홍대와 같은 길거리에서 그때마다 만 원 이만 원 주고 시계를 사 모으기도 했다. 옷, 신발, 가방 색에 따라 다른 시계를 차고 싶었다. 그리고 시계를 차지 않고 나간 날은 자주 쳐다보지도 않으면 마냥 불안했다. 손목이 허전한 느낌이랄까.

어느 정도 나이가 먹고 나선 조금씩 브랜드 시계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두개 모인 시계는 여러 개가 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턴 잘 차고 나가지 않았다. 한 번은 오랜만에 시계를 손목에 떡 하니 차고 나가서 하루 종일을 돌아다니고 놀았는데 언제부턴가 녀석이 멈춰있었다. 하지만 나도 나와 어울리던 친구들도 전혀 알지 못했다. 왜냐면 우리는 핸드폰이 있으니까.

몇 시냐는 질문에 당연하게 핸드폰을 켜는 우리에게 멈춰버린 시계는 그저 손목에 찬 액세서리 정도 일 뿐 이었다.

멈춰도 상관없네, 넌 팔찌들만큼이나 멋진 악세사리니까. 용도가 바뀌어 좀 미안하긴 하지만



















#2


오른손잡이로 산 게 벌써 삽 십 년이 넘어가지만 나는 가끔씩 양손잡이 흉내를 낸다.

그중 손에 익숙해진 버릇이 숟가락을 왼손으로 잡는 것과 시계를 오른손에 차는 것이다. 글씨를 쓰는 손도 그림을 그리는 손도 오른손이지만 핸드폰, 노트북의 사용이 많아지면서 더 자연스럽게 오른손에 시계를 차게 됐다.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당연히 오른손잡이인 나한테 오른손 시계는 불편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익숙해진 상태다.

양손잡이가 되고 싶었다. 어느 날 오른손에 시계를 차니 자주 쓰는 손인 만큼 보기가 편했다. 어렸을 때 왼손으로 뭘 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소리 때문에 늘 오른손 위주로만 사용해 왔었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조금씩 반항끼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거 같다. 소소하게 어른들과의 식사 자리가 아니고서야 숟가락을 왼손으로 하는 버릇을 점차 들이기 시작했다. 왠지 나는 왼손잡이가 멋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김피디도 멋져 보였다. 어떻게 당구를 왼손으로 치지? 다트도 왼손으로 던지네? 보드도 왼쪽 방향(?)으로 탔다. 하지만 칼질이나 다트 던지는 거, 당구를 왼손으로 하는 진짜 양손잡이 김피디는 이와 같은 일들을 할 때는 시계를 풀러야 했다. 나는 아닌데.... 진짜 양손잡이가 아닌 거 아니야?!



#3


새벽 2시.'이제 자야겠다.' 하며 거실의 불을 끄고 방에 가는 길 방문 옆에 달린 시계를 쳐다봤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책감에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시계는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거실로 갔다. 소파에 앉아 시계를 한참 쳐다봤다. 밤낮이 조금씩 바뀌고 낮보단 밤에 생활하는 일이 많아진 나에게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친구들과는 달리 사회적, 경제적으로 많이 뒤쳐져 있는 나에게 시간은 어떨 때는 너무 남아 괴로운 것이기도 했고 무심코 흘러버린 것 같아 야속한 녀석이기도 했다.

이 날, 고장 났지만 힘겹게 초침이 움직이며 아직은 살아 있던 벽시계가 나에게 '너만의 다른 시간을 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녀석은 힘들 거다. 남들과 비슷한, 똑같은 시간으로 가려면 말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되뇌여 보지만 여간 힘든게 아니다.


나도 얼른 제대로 맞춰진 시간을 갖고 싶다. 힘내!










#4



김피디와 그 친구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던 날. 다들 한 브랜드에 대한 시계 이야기를 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전부 그 브랜드 시계를 차고 있었다. 남자라면 00 시계라나! 우리는 쳇! 하며 콧방귀를 끼면서도 멋있게 생긴 시계긴 하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제주 여행을 마치고 면세점에 들린 우리는 그 브랜드를 찾기 시작했지만 면세점엔 입점한 브랜드가 아니었다. 아쉬움에 김피디의 다른 시계를 골라주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동네 근처 백화점에서 00 브랜드를 발견했다. 면세점에서 시계를 산지 며칠 안 되서였지만 그에게 사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 친구들을 만나라고 했다. 나에게도 00 브랜드의 시계를 선물한 김피디와 함께 물놀이를 갔다. 이제 물속에서도 시계를 볼 수 있게 됐다. 이런 거 때문에 남자는 00이라고 한 거야?! 좋긴 좋더라. 라이트도 있고 말이지. 이제 우리도 그런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고 우리끼리여서 좀 유치했을 수도 있지만 신경 쓰게 되는 구나 싶었다.




#5


핸드폰에게 자신의 자리를 몽땅 내어준 게 아마도 시계일 거다. 아직까지 고가의 명품 시계들은 그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순 있겠지만 시계 본연의 역할보다는 부의 상징이니까. 사실 자신의 용도에 맞는다고 볼 순 없다.

손목시계는 휴대용 시계다. 어디든 간편하게 손목에 찰 수 있고 어디서든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전자시계든 시침시계든 배터리가 나가면 그대로 멈춰버린다. 멈춰버리고 방치된 시계들의 배터리를 갈려고 시계방을 찾다 알았다. 그 많던 시계방도 없어졌다는 걸 말이다. 결국 집에서 한참 먼 곳까지 걸어와 맡겼는데 가격도 개당 4천 원에서 5천 원. 여러 개를 가지고 갔으니 그 값이 만만치 않았다.

이사 오면서 알람시계를 버렸다. 한 번 울리고 손으로 끄면 더 이상 반복이 없는 녀석이고 시간대 별로 마구 울려 대주는 핸드폰 알람이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 때문에 여러 형태의 알람시계가 나오고 있다. 로켓이 발사되어 로켓을 다시 발사대에 꽂을 때까지 울리는 알람, 혼자 마구 방을 돌아다니는 알람 시계 등등 말이다.

알람시계야 뭐 깨워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 역할에 아주 충실하기 위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녀석들이다.

인테리어 효과도 있어야 하고 재미도 있어야 하고. 사실 따져보면 아주 그 역할에 충실할 수만은 없기도 하다. 그냥 사실 핸드폰 하나 있으면 되지 뭐. 멈춘다는 건 핸드폰 배터리일 뿐, 알람은 1분 단위로 맞출 수 있고 요즘은 직접 끄지 않으면 설정대로 5분 후 다시 울려주기도 하니 말이다. 충전만 잘 시켜놓으면 다시 배터리를 갈고 시침, 분침을 맞출 필요도 없으니.

스마트 워치도 점점 더 출시되고 있으니 정말 부의 상징으로서의 고가 명품 시계를 빼곤 자리를 완전히 뺏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 시계를 보는 게 익숙하니까 핸드폰과 나눠가며 잘 써야지! 째깍째깍 하며 나는 소리가 내겐 아직까지 아날로그적 감성을 주니까!


어쩔 수 없네. 핸드폰이 다 해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