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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Sep 16. 2015

그와의 하루 동침

파리에서 마주친 나의 비루한 모습

파리에 가는 게 평생 소원이었던 나. 서른 한살이 되는 생일날 저녁 나는 파리에 도착했다.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샤를드골 공항은 여느 책에서 본 것과 같은 느낌이어서 안타까웠다. 도저히 파리의 낭만을 찾을 수 없는 그저 그런 공항.


바리바리 싼 짐 덕분에 나는 한인픽업을 준비했고 에스컬레이터나 엘레베이터를 찾기 힘든 파리 지하철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만난 기사님의 차에 두둑히 짐을 실었다. 도착한 시간은 파리 시내의 러시아워였고 그렇게 별 수 없이 천천히 시내로 가는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 나의 기분은 점점 더 큰 설레임으로 가득 찼다.

20여년을 파리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가이드, 한인픽업 등으로 생활하는 그로부터 듣는 여러 이야기들이 머무는 동안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시간여 정도 달린 끝에 숙소 앞에 도착했다. 8일 정도 머무는 나의 일정은 파리 5구에 위치한 현지인 숙소로 정했다. 동네는 깔끔했고 좋은 곳(?)이었다.

주인이 문을 여는 방법을 보내 준 내용을 다시 한 번 숙지하고 기사님과는 헤어졌다. 낯선 파리 집의 문 여는 방식을 여러 번 읽고 다시 읽은 뒤 1층에 위치한 숙소 방문을 열려고 키를 여러번 넣어 돌리고 있는데 자동문처럼 문이 스르륵 열렸고  그 앞엔 '제리'가 서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처음 마주한 한인픽업 기사님이 준 안정감과 설레임은 부리나케 도망을 가버렸고 내 앞엔 미국에 사는 흑인 중년 아저씨가 서 있었다. 왜 나는 놀랐던 걸까? 여기는 해외이고 주인이 보낸 메일에 친구 '제리'와 하루 정도 겹쳐 숙소를 같이 써야 하니 이해해달라는 내용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는 나가려는 듯 옷을 다 챙겨 입은 상태였고 양말도 한짝만 신은 채로 나를 맞이했다. 당황하는 나와 달리 그는 반갑게 웃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정신이 번쩍 든 나도 인사를 나눴고 그가 가던 길을 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집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에게 욕실 사용법, 내가 묵을 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고 영어가 짧은 나는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았고 그런 나의 표정을 살피고 더 쉬운 단어들이나 바디 랭귀지로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나의 당혹스러웠던 마음은 좀처럼 가라 앉지 않은 상태였고 대충 이야기가 끝나고 내가 묵을 방에 일단 짐을 풀고 김피디에게 연락했다. "보고싶어. 나 돌아갈까." 라고.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 하기엔 너무 길고 하룻밤이지만 제리와 묵는 밤이 내게는 너무 두려웠다.


신혼여행을 온 부부를 에펠탑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고 멈추지 않는 제리의 설명을 끊으며 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갈거냐고 물으며 핸드폰으로 파리 버스 앱과 지하설 노선을 확인할 수 있는 앱 역시 알려주었다. 그는 너무 친절한 사람이었고 여전히 양말은 한짝만 신겨져 있었다.

그는 자신도 나가야 한다면 가방 한 가득 찬 빨래 가방을 챙겼다. 집에서 빨래를 해 근처 빨래방에 가 건조하려는 거였는데 내가 오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일을 전부 멈추고 나를 챙겨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없는 상태였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나는 신혼부부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고 나 어째야 하는지 칭얼거리고 말았다. 사실 무서웠다.

그가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실 그가 떠나고 그제서야 안 사실이었다. 신혼부부를 만나 놀란 가슴을 달래고 그제서야 나의 생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잊고 놀자 싶어 파스타와 와인 한 잔 마시고 두런두런 낯선 느낌이 주는 설렘을 잔뜩 안은 채로 이야기를 나눴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난 또 두려워졌다. 흑인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하고 이것도 저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잔뜩 듣고 온 첫 유럽이라 마주친 제리는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거다. 어느새 숙소에 도착했고 제리는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와인 한 두잔 마신 김에 그에게 말을 걸었는데 속내는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내가 맘 편히 잘 수 있겠다 싶은 거였다. 거실에 자리를 편 제리에게 다가갔다.

짧은 영어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달동안 파리에서 휴가를 보낸 그의 사진들을 봤다. 굉장히 화려한 색의 선글라스와 장난스런 표정들이 가득한 사진 속의 그는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사진도 찍 고 이야기도 나눈 모양이었다. 그리고 파리의 베스트를 물어본 내게 그는 오르세 미술관을 말해주었다.

그는 미국에 사는 사람이며 자신이 사는 집에 대한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통한 듯 통하지 않는 말들도 이야기를 나누고 맥주한 잔 하지 못해 아쉽다는 그의 말을 뒤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나는 침대 속에서 무척이나 부끄러운 나와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이 두려웠던 것인지 나의 편견과 선입견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가 마지막에 한 행동은 방 문을 닫고 누워 있을 때 노크를 하곤 이따가 화장실에 갈 수도 있으니 지금 가겠다는 말이었다. 양말 한 켤레만 신은 채로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고 나를 배려하던 모습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따뜻하게 남아있다. 다음날, 제리가 떠나기 전에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엄마가 직접 만든 팔찌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선물로 준비한 나는 그 중 그에게 어울릴만한 것을 처음으로 개봉했다. 그에게 팔찌를 주고 엄마가 직접 만든 것이라 전했고 그는 나에게 파리 지하철 티켓 10장을 주었다. 예상치 못한 현금 박치기 선물 때문에 놀라면서도 팔찌를 주며 으쓱하려고 했던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고 말았다. 비상식량이자 긴 유럽 여행의 힘듦을 달래 줄 컵라면을 하나 더 꺼내들고 왔다. 그에게 먹는 법을 알려주니 한 번 먹어본 적이 있으면 한국 김치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와 훈훈한 선물을 주고 받고 사진 한 장 남긴 채 나는 신혼부부의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다시 숙소에 돌아왔을 때 그는 사진을 메일로 보내달라는 메세지를 남겨둔 채 떠나고 없었다.



그 덕분에 이후 여행에서 낯선 사람에 대한 이유 모를 경계는 좀 풀렸다. 혼자였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당연한 두려움이겠지만 그로 인해 나는 내 밑바닥을 보았고 여행에서 사람을 만나는 큰 행운일 수 있는 일들을 걷어찰 뻔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에게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메일을 쓰지도 않고 이렇게 글만 올린다. 번역기를 돌려야하는 비루한 영어실력 때문에 또 다시 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제일 무서운 세상이지만 또 사람이 가장 아름답기도 한 건데.... 떠나지 않았다면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나의 편견과 선입견....

아주 조금이라도 내려 놓고 올 수 있어서 그때의 그 여행은 그렇게 값진 것이 되었다.


미안하고 고마웠어요. 건강히 잘 지내고 있길 기원해요. 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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