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나던 날, 나는 명랑했다.
빠름, 빠름, 빠름~
나는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살에 대학을 갔으며 23살에 졸업을 하고 23살에 입사를 하였다. 내 인생은 왜 이리 쉴 틈 없이 빨라? 하면서도 남들보다 앞서가고 있어! 하는 그 희열을 나도 모르게 즐겼나 보다. 이제 취업을 했으니 마지막으로 결혼과 금쪽같은 내 새끼들을 낳는 일만 남았다. 그리하여 나는 28살에 결혼을 했고 28살에 아이를 낳았다. 29살 한 해 꼬박 육아에 전념하였고 30살에 구조조정을 피해 회사로 복직하였다.
내 인생의 비전은 바로 결혼이었다.
생각이 많은 내가 결혼을 내 인생의 Vision으로 설정하고 그 목표를 아주 멋지게 달성했으니 이제 행복하게 살 날만 남았구나. 내 인생에 이렇게 추진력을 발산해 보고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했던 일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나란 여자는 참 멋졌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추진.... 바로 이혼이었다. 직, 간접적인 피해자들이 더 많이 속출하였다.
누군가가 그랬다. 왜 이리 일찍 결혼했어요?" 그 옆에 듣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두 번 하려고 그런가 보지!
벌써 10년 전, 그땐 웃고 넘겼던 일화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럴 가능성도 있겠구나 하며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정신 못 차렸구나? 그렇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나에게는 그 사람이 가해자이나 내 주변사람들에겐 내가 가해자이다. 아이를 생각하면 이혼은 하지 말아야 하고 나를 생각하면 숨 막히는 고통이었다. 아빠, 엄마, 언니를 생각하면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 자체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쇼윈도 부부처럼 살라면 살 수도 있었으나 그것 조차 허락되는 건 아니었다. 그나마 살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회사 덕분이었다. 나에게는 회사가 출구였고 안식처였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대단한 직업은 아니었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승진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월급이 오르면 집안에서의 대접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왜 이렇게 자존감이 바닥을 치게 된 것이었는지 답을 찾지 못할 때면 차라리 미움을 받자는 생각에 '미움받을 용기'를 집어 들었고 그래도 불안하면 다 내려놓자며 법정스님의 책을 끼고 살았다. 여기서 잠깐, 이혼이 가져준 선물을 이야기하자면 바로 독서와 가까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오는 23년 7월 여름이 되면 결혼한 지(?)만 10년이 되는 날이네?
결혼 생활 8년 만에 이혼을 하였고 이혼한 지는 만 1.5년이 되었는데... 결혼과 이혼이 인생의 큰 이벤트임에는 분명하니... 이쯤에서 나의 최근 10년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그렇지만 기억은 왜곡이 되는 법. 그 사람을 생각하면 여전히 화가 나는 건 어쩌면 지금의 내 삶을 정당화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보지 못한 좋은 점이 있으리라고 아주 어렵게 상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이 10년 사이에 달라졌으나 끝내 달라지지 못한 점이 있을 것이고 여전히 같은 실수를 할까 봐 두려운 돌싱맘이며 또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처음인 초보 엄마이다.
두 번의 결혼은 가히 상상이 안된다.
그러나 두 번째 인생은 맞다고 할 수 있겠다.
2021년 11월 26일
강남 노른자 땅, 주차헬인 아파트에서 발레을 하며 지냈던 삶을 청산하였다. 이혼도장을 찍기 약 2년 전부터 우리 부부(그땐 부부였으므로)는 긴 강잠이 넘치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2013년,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이 긴장은 시작이 되었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각자 가지고 있으면서 지난한 세월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것이었다. 중간중간 크고 작은 지뢰들을 밟고 터뜨리고 때론 피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였다.
어떻게 던 이혼은 면하길 원하는 남편과 그러면 그럴수록 더 멀어져 가는 나의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해야 하는 일련의 일을 차질 없이 이어나가야 하니 이렇게 안팎으로 바쁜 적이 있었나 싶었다. 이혼 직전 나는 승진차수였고 개인적인 일로 인해 회사일이 차질이 생기거나 행여 이혼 과정 중에 있는 거었다는 것이 들킬까 봐 내 앞으로 떨어지거나 떨어질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혼을 하면 가장 큰 걱정은 경제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승진으로 인한 급여상승은 이혼과 더불어 나의 목표였다.
나의 그릇된 판단을 인정하긴 하였으나 그래서 그 걸을 이 사람과 함께 끌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청산할 것인가. 이 고민을 수도 없이 했다. 누군가가 그랬다. 백지에 이혼의 장, 단점을 쭉 써 내려가보라고.. 이혼을 하지 않으면 누구나 겉보기에 부러운 삶을 살 수도 있었다. 좋은 동네, 좋은 학군지에서 아이도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고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일부 내 자아를 실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부관계라는 본질을 생각해 보았을 때 나는 그와 함께 정서를 나누며 살아가기 힘들겠다는 결론에 다 달았고 정서를 나누며 사는 것은 내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이혼을 하는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었다. 따지고 보면.. 결정이란 건 10대 90의 싸움이 아니라 49대 51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문제도 오랫동안 붙잡고 생각하다 보면 결국 그 문제에 함몰되어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사건들이 뇌리에 박혀 그를 껴안고 갈 수 없었다.
흔히 이야기하듯 ‘정’으로 사는 게 부부리건만 우리에겐 그런 장치도 없었던 걸까. 나를 알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이혼이라는 이벤트를 통과하면서 발견한 나의 모습 중 하나는 “말로써 상처를 준 사람, 신체적으로 상처를 준 사람 그리고 어른에게 예의 없이 군 사람"을 난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고 지나친 어리광과 울부짖음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와 아찔함을 너머 위협마저 느끼게 하였다.
그가 남긴 어록, 여전히 충격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 그저 나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8억짜리 집을 해왔으면 밥 하는 건 당연한 거야!”
“어머니는 왜 화장실에 나방파리 해결을 안 하시는 거야?
“집에 먹을 게 없더라”
“아버님, 어머님한테는 앞으로 도움받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
“처형한테 사과하라고 해”
“당신 일하는 것 때문에 왜 가족들이 피해를 봐야 해? 미안해해”
“내 집이야 나가!”
내가 누구와 뭘 하고 있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의 분노는 나의 마음을 더욱더 걸어 잠그기에 충분하였고 지켜보던 나의 친구는 농담조로 말했다. “나였으면 찔러 죽였어...”
더 끔찍했던 건 어떤 종류의 싸움이던 그날 당장 풀어야 했고, 화해의 방법으로 잠자리를 요청하고 그다음 날이면 아무렇지도 않았던 듯 평온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난 증오 했는데 그 마음 때문에 나는 더더욱 괴로웠다. 매일 아침밥을 하고 별도로 점심 도시락까지 싸고 새벽같이 출근을 하였는데 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군말 없이 하루가 가면 그게 나에겐 가장 평범한 하루이자 행복한 하루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그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이런 내가 불쌍하였다.
용달차가 도착한 그날로 다시 돌아가 본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용달차가 도착했다. 마음이 분주했다.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충분했지만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 나는 아이의 물건을 하나라도 빠짐없이 다 챙겨서 나가야 했다. 나와 아이가 관계된 물건이 하나라도 남겨져 있으면 안 되었다. 이 와중에 황당했던 건 “이왕 짐 정리하고 버릴 거 버리는 거니, 미안하지만 안 쓰는 물건들도 좀 버려줘"
“미안하지만”이 이럴 때 쓰는 조사였던가. 남겨진 자의 서글픈 부탁이겠거니 했지만 또 한 번 느꼈다. “아 역시 결이 안 맞아..
게다가 2학년 마무리할 때까지 약 한 달만 아이가 지금 집에서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러기 싫다고, 왜 그런 호의를 베풀어야 하냐며 거절했다. 아.. 이 아이는 나 혼자 만든 거구나. 남자란 족속들이 다 이런 건가? 그럼 그렇지.. 마지막까지 혀를 내두르게 하였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내가 남편한테 무던하고 잘해야 집안이 평화로웠고(아이 앞에서 화를 내지 않았고) 그렇지 않을 땐 아이 앞에서 과격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결심"이라는 단어는 행동을 유발해야 한다. 그보다는 이혼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데 그친다. 나도 그랬다. 아이가 너무 어렸고 내가 가진 게 별로 없었지만 또 혼자 살 상상을 하니 궁색해지고 싶지 않았다. 고비를 넘기면 또 하루, 이틀 시간이 가 있었고, 아이가 유치원에 가야 할 시점이 되거나 초등학교 입학 시기가 되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잠시 동안은 잠복기를 거쳤다.
이혼을 해보니 이혼의 팔 할은 과정에 있었다. 여태까지 생각해 오던 행복의 기준을 다시 내려놓고 버릴 건 버리고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건지고 정렬해야 했다. 대외적으로 나는 시집을 잘 간 여자였다. 굳이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냐며 아이는 어떤 학원에 다니며 유학은 보내지 않을거냐며,, 많은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했다. 이런 관심이 싫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부러움과 갈망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도 나는 꽤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 이혼을 결심하긴 했는데 말이지!
부부사이의 본질과 대, 내외적인 행복의 기준이 아주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러던 중 웬만하면 같이 살아보기 위해 남편에게 귀여우리만큼 작고 소중한 제안(나도 내 명의로 적금 들고 싶어!)을 건넸지만 이마저도 역정을 내는 것을 보고 좌절의 경험은 늘어만 갔다. 앞으로 또 나를 해치거나 위협을 하면 그땐 이러한 방식으로 이혼을 하자고 합의서를 건네기도 했는데 사인은 해주겠지만 원본은 못주겠다고 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었다. 이혼 직전까지 부부상담을 진행했었는데 마지막에야 모든 걸 내려놓는 걸 보고 나는 생각했다(심지어 신혼집으로 살았던 아버지 명의의 아파트를 주겠다고까지 했다). 평생을 내가 어르고 달래며 기분 나쁘지 않게 설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차라리 내 눈에 그가 귀여워 보였다면.... 난 평강공주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