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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빙 Dec 30. 2023

[사색] 공간에 대한 사랑과 집착

추억을 추억으로 남기는 것


30년이 넘은 13평짜리 주공아파트. 그곳이 대학시절 나의 자취방이었다.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은 동기의 집을 찾기가 더 어렵고, 어딘가 한두 군데씩은 삐걱대는 아파트이나, 역시 원룸보다는 보다는 넓은 게 좋지, 동기들끼리 모여있으면 좋지 하는 생각에 어느새 그곳은 우리의 집성촌이 되었다.


나는 그곳을 애정을 가지고 꾸몄다. 인터넷에 싸게 판매하는 자취생용 가구들이 전부이나, 온 집안 나의 애정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3년. 3년 동안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고, 심적으로 힘들었던 시기 나의 유일한 대피소가 되어 주었다.


베란다 천장에서 페인트가루가 휘날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지 못했고, 비가 오면 베란다 바닥이 물로 흥건해졌다. 한 번은 위층 보일러관이 터지는 바람에 거실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는 기이한 경험을 했지만, 그럼에도 그 아파트는 나의 애정이 담긴 공간이었다.


그렇게 졸업이 다가오고 이 집을 처리해야 하는 기로에 서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애정 가득한 공간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물론 집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대학원을 갈지 어쩔지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전세계약을 3년 더 연장하기로 했고, 거기에 내 집에 대한 생각이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나의 자취방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집 가지고 뭔 호들갑이냐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의 자취방은 내게는 단순히 집뿐이 아니었다. 나의 친구이자 취향의 집합소이자 힘들 때 이 집 안에서 많은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전세계약 연장은 회피성의 결정이었다. 졸업시즌이 다가오고 결정해야 할 것이 많아진 나는 결국 그냥 이 상태를 더 유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무언가를 결정하고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그저 시간을 조금이나마 끌어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한 학기를 집을 비우고 이 공간에 다시 돌아오게 되어야 할 때 나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이 공간에 다시 온다는 것은 또 힘겨운 학교 생활의 연장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때 엄마가 말씀하셨다. 너무 스트레스받는다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네가 편한 대로 하라고.

그래 온갖 변명을 해대며 그 집에 남을 구실을 뒤로한 채 자취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것은 집을 떠나보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내 현실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다행히 주인아주머니가 별말씀 없이 계약을 해지해주셨고,  나는 자취방을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루 날을 잡고 자취방의 물건들을 용달에 실어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취방과의 3년 동안의 인연은 끝이었다.


예상과 달리 마음이 아주 후련했다. 분명 너무나도 좋아했던 공간이었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지만, 막상 자취방을 떠나보내자 너무나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느꼈다. 자취방을 끌어안고 있는 나는 과거에 묶여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그리고 과거에 묶여 있다는 것은 현재를 맞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떠나보내야 할 때가 왔음에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은 미련이다.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왔음에도 떠나보내지 못하면 오늘을 살아가지 못한다.


떠나보내야 할 인연임에도 계속해서 붙잡고 있는 것. 떠나보내야 할 과거를 계속해서 붙잡고 있는 것. 그것이 내게 너무나도 소중했기 때문에 내 손에서 떠나보낸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두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떠나보내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틈이 없다. 과거에 사는 사람은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지 못한다.


그렇게 집과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나는 추억을 추억으로 남긴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끝은 우리를 새로운 시작으로 이끌어준다. 추억은 추억으로써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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