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핀 꽃은 언제나 하얀색이라는 사실은, 봄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매년 새로운 설렘을 준다. 아무것도 덧입히지 않은 하얀색. 마치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꽃들을 위해 자리를 준비하는 듯 덜어낸 색으로 희게 피어 있다. 먼저 밖으로 나와 아직 완전히 도착하지 않은 계절의 온도를 확인하고 햇빛의 농도를 가늠해 본다. 누군가의 만개를 위해 먼저 길을 내어주는 일. 기꺼이 먼저 피어 기꺼이 먼저 사라지는 그들의 짧은 다정. 그 짧은 시간 속에서조차 주저함이 없는 모습이 어쩐지 희생이라기보다 선택에 가까워 보인다.
봄은 늘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 확실하게 도착했다는 신호 없이 누군가의 조용한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치 한숨 끝에 닿은 시선이 그려낸 또 다른 숨의 결이, 왜인지 억세지 않은 바람이 가져온 안도를 닮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눈동자를 한 곳에 가두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일이 없는 계절. 그래서인지 봄에는 마음이 쉽게 방향을 잃는다. 어떤 노래는 봄에 가을을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계절을 건너간 마음은 속도를 내어 사랑하고픈 유치한 고백과도 같다. 빠진 사랑 곁에서 또 다른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많거나 적거나 하는 것 없이 같은 무게로 넘쳐나는 저울에 담겨있기에 밉지 않은 욕심이 된다.
어제 본 흰 꽃은 하루 새 양보를 마쳤나 보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이미 모든 것을 시작해버리고는 조용히 사라진 아름다움. 그 조용한 용기 덕분에 우리는 매년 아무렇지 않게 봄을 맞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런 세상이 되기를 잠시 바란다. 기꺼이 희게 시작할 용기를 가진 이들로 가득한 세상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먼저 피어 누군가의 계절을 조금 덜 춥게 만들어주는 존재로 가득한 세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