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는...
50대 초반 몇, 육십 대가 거의, 칠십 대도 있는, 이런 면면의 여자들 사이에서 장례식 얘기가 나왔다. 분위기가 후끈했던 걸로 보아 생각이 많았던 주제였다.
한국에서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민살이 20년을 넘거나 30년에 가까운 사람들이었기에 색깔과 뉘앙스가 좀 더 찐했다.
재작년에 타계하신 영국 여왕님의 부군께서는 생전에 당신 장례의 내용과 형식을 정해 놓았다고 한다. 코비드 팬데믹 상황이어서 본때 나게 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백 살 가까이 사셨던 그 양반도 그가 만났던 수수 많은 장례에서 생각이 많았던 것이리라
나만해도 대충 세어봐도 이제껏 많은 죽음을 만났다. 먼 기억으로는 부모님이 초상에 간다 하던 몇몇 밤이 있다. 친가와 외가의 고향 사천과 하동을 오가려면 하룻걸음 갖고는 안되었다. 초상집에 다녀온 부모님의 두런거림과 평소에 못 보던 떡과 전 등이 어렴풋하다.
직접적으로는 조부의 임종이다. 50년 전, 당시로도 장수했던 여든둘이었다. 노환도, 앞세운 자손들도 없었기에 호상이라며 질펀했다. 집안의 아제씨와 아지매들이 가득 오신 데다 연일연일 묵고 마시고였다. 그게 우째 그리도 이해가... .
일행들의 관심이 컸던 부분은 영정 사진이었다. 사람의 이미지는 사진 속에 남는 것이라 이해된다. 폰으로 직찍 연습을 한다, 와 어릴 적 젊었을 적의 사진이 좋다,는 등. 나는 중학교 여행 중의 사진이 맘에 들지만 그건 안될 것 같다. 재작년에 돌아가신 큰오빠는 유럽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었든지 그걸로 하겠다는 얘기를 곧잘 했더랬다. 내가 봐도 좋았는데 평생 한량이었던 나의 큰오빠다웠다.
음악도 품이 많이 들었던 얘기였다.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없었는데 사이먼 앤 가펑클의 복서라면 어떨까 한다. 예수쟁이임에도 카세트에서 울려 퍼지는 무작위 찬송가는 성격과 목적이 판이해서 망설여진다.
기억나기로는 스웨덴 그룹 아바의 노래가 울려 퍼지던 장례식이 쌈빡했다. 남은 식구들의 선곡이 인상적이었다. 땐씽 퀸, 맘마미아 등.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분들 가운데 이민 온 지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전 직장의 동료들과 학교 선후배와 친구들에게 연결이 되어서 만났다, 왔더라 하는 얘기를 듣는다.
그와는 형편이 다른 이곳, 중년의 여자들에게 '나'의 그것은 어찌 될는지, 걱정, 염려 또는 공포라고 불러도 될법한 감정들이 없었다, 고 말 못 하겠다. 이민자인 우리에게는 부모 형제자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식들이 물 건너 외국에 사는 경우가 태반이다. 근래에 역병의 재난을 겪었기에 오도 가도 못하는 그 형편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다면 보통 사람이 아니다.
장례식에서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사촌정도의 가까운, 어려서는 한집에서 또는 바로 옆집에서 자랐던, 싸우기도 했지만 함께 했던 추억도 많지만 이제는 쫌은 서먹한, 전번을 따면서도 다시 연락이 안 되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뼈가 저리도록 외롭기에 이별이 실감 난다.
반성과 후회도 이만한 곳이 없다. 고인과 관련된 실수 했거나 잘못했던 일만 떠 오르기에 애증 가운데 어느 쪽이든 다짐 비슷한 것도 있다. 약빨의 길이는 깊이에 따르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죽는다는 자각의 순간은 일상에서는 갖기 어려운 자기 정화와도 같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온다. 그 시절 미국의 장례 즉 매장의 끝부분은 총부림이 종종 일어났다고. 그런 의미에서 책임전가와 핑계, 변명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만해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견딜 수가 없어서 나외에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셀프 위로에다 썽도 내고했다.
처음에야 말로 했겠지만 미국에서는 총부림이고, 우리는 주먹이 나오고 술잔도 날고... . 종내는 화해를 안 하거나 못하거나, 물로 칼 베기가 되거나 말거나 뭐 그런 것 같다.
다음은 같거나 비슷하거나 다른 경우인데 시외조모께서 여든여섯으로 타계하셨을 때 얘기이다. 복잡한 가족관계에서 오는 복잡한 옛날 얘기들이 한참 쏟아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먹고살만하거나 배울 만큼 배웠다거나 하는 장신구가 필요 없었다.
옛날 얘기처럼 시작했는데, 하...! 억울하고 분하고 슬퍼서 아니 살고 못 살 것 같았다며 막내 삼촌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큰삼촌은 그나마 정신을 유지하는가 싶었는데 결론은 매한가지. 고인의 둘째 따님은 예순 넷이었는데 맏이인 예순여섯의 언니에게 해댔다. 엄마가 언니만 편애했노라고 자신을 한 번도 엄마 사랑 제대로 못 받았노라고, 그 연세에...?
키위들의 장례에도 몇 번 갔다. 우리나라 장례식은 부조금 문제가 첨예한지라 비즈니스의 연장처럼 보인다. 부조금 문제가 없는 이곳의 장례식은 고인에 온전히 집중한다.
겉으로라도 슬퍼서 죽겠다는 표정을 별로 없었고, 질병이나 노환으로 고생한 분들에게는 대체로 고통이 끝나서 기쁘다라고 하는 말이 적절하게 들렸다. '진 병에 소자(긴 병에 효자)가 없다'라고 우리 엄마가 자주 말했다.
몇 년 전에 유언장 쓰는 연습을 했다. 이별을 생각하니 두 형제가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가 간절했다. 내 나이 서른다섯에 예순여덟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그들이 그보다 어린것이, 이후 고아와 같았던 시간이 그들에게 남을 것이 아프고 슬펐다.
연전에 가족장을 치른 가정을 알고 있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별세하신 윤정희 씨 가정도 가족장을 치르겠다고 한다. 어떤 모습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23,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