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by melina

“내가 모든 걸 망치면 어떡하지?”

허리를 굽혀 고속도로 밑의 작은 개구멍을 지나며 현서가 문득 물었다.

-망치긴 뭘 망쳐요. 자꾸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세요.

수안이 귀찮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무엇이 옳은지 만 번을 질문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닐리가 없으니까.

금붕어 키우기 게임 이야기인듯 했다. 어차피 답을 알려주지도 않을 거면서, 현서도 콧방귀를 꼈다.

-그리고 제가 뭐 세상을 구하쟸어요? 어차피 망할 세상,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거예요.

하여간 말은 잘했다. 어차피 그 말 한 마디에 개구멍을 기어가는 건 현서의 몫인 걸. 그래도 밉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어떤 관계도, 선택도, 책임도 만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현서였다.

-현서님.

“왜 또.”

배가 고프지 않아도 꿀은 입에 달다고 했던가. 필요치도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신의 발 밑을 지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가 없이는 누구도 완전해질 수 없어요.


“그게 또 무슨 소리야.”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N대학 901D호 연구실.


선은 같은 인터뷰 자료들을 벌써 몇 번째 검토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특히 태양 폭발과 BDA 증후군의 치료를 아무리 연관지어보려 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인과가 없는 사건이라기엔 타임라인이 너무 절묘했다. 마치 태양에서 흘러나온 것이 그들을 치유한 것처럼. 하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태양 폭풍은 온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든 주범이였으니까.

커다란 사건 뒤에도 세상은 별 일 없다는 듯 굴러갔다. 세상은 폭발 한 번에 속수무책으로 엉망이 되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되었다. 다 망했다고 푸념하면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해낸 사람들 덕분이겠지. 그 미묘한 질서에서 자연의 아름다움 마저 엿보았다면 너무 과한 감상일까. 작은 곤충들이 모여 땅을 일구고 동산이 되고 숲이 되는 것 같은 전체의 그림이 얼핏 엿보이는 듯 했다. 우리는 전체로서 존재한다.

사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지만, 그 모든 것이 마치 누군가의 의지처럼 느껴졌다. 미국에서 학회를 마친 후 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곧 비행시간이 다가와 게이트를 확인하기 위해 비행정보가 가득 띄워진 전광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비행 일정들이 하나씩 지연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대거 취소되었다. 순식간에 공항 안이 온통 소란스러워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공항 측은 단순 전산 이상이라고 사람들을 안심키긴 했지만, 결국 비행기들은 모두 취소되었다.

미국 정부는 연일 사이버 테러를 의심하며 북한의 소행일지 모른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하지만 미국 뿐만이 아니었다. 세계 각지의 비행 시스템이 일시에 모두 마비된 것이다. 오류가 해결되지 않아 발이 묶인 반나절 동안 전세계는 전쟁 가능성으로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그 혼란을 끝낸 건 아이러니하게도 지구를 뒤덮은 오로라였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관제 시스템의 마비도 태양 폭발의 영향이었을 것이라 해석되었다. 하지만 선은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어떻게 폭발이 일어나기도 전에 사이드 이펙트가 먼저 발생할 수 있다는 걸까.

게다가 이런 규모의 태양 폭발에서 단 한 건의 비행기 사고나 피폭도 일어나지 않은 건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건 선박과 열차도 마찬가지였다.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것이 잠시 멈춰 태양 폭발을 기다린 것처럼. 이게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선은 이 이야기들을 연결짓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한 사람처럼 비춰지겠지만, 보이지 않는 보살핌 같은게 느껴졌다. 간절한 기도와 어루만지는 손길 같은 것이.

이후의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양 폭발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해결책을 모두 계획해둔 것처럼 모든 복구 작업들이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누군가 이 세상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느낌과 동시에 그 마음으로 인해 모든 것을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그것이 영성이라면 선은 기꺼이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똑똑-.


들릴 듯 말듯 작은 노크소리에 선은 깜짝 놀라 깨어나듯 문을 바라봤다. 정신이 없는 매일에 울린 경종처럼, 그 작은 노크소리가 날카롭게 선을 깨웠다. 연구실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내내 붙잡고 있던 태양 폭발에 대한 자료들을 내려놓았다.

“네, 들어오세요.”

한 남자가 조심스레 문을 밀며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서는 마주 서 수안과 똑같이 생긴 얼굴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선은 수안이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현서가 수안을 아니까. 너조차 너를 잊어도 나는 알고 있으니까.

“태양 폭발과 오로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선은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어쩐지 그 이야기가 궁금했다

“근데 여기 문에 붙여 둔 스티커가 떨어져있더라고요.”

현서가 문 앞에서 주운 ‘기대지 마시오’ 스티커를 내밀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이어져있다. 모든 현실을 초월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다. 그건 정말 이상한 실감이었다.

“아, 자주 그래요. 매번 붙여둬도 계속 떨어지길래 그냥 놔뒀어요.”

현서는 이런 류의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결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연결되어 있다니. 그렇지만 모든 것이 아무래도 괜찮다는 확신이 현서를 감싼 건 단순한 느낌이 아닌 명확한 실체였다.





- 진짜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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