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관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다정 Nov 16. 2022

고장 난 어른



 내게는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하는 동생이 하나 있다. 그녀는 가끔 나 같고, 어떤 때는 피붙이보다도 가깝다. 그녀에겐 이제 갓 네 살이 된 딸이 있는데, 나는 그 친구를 참 좋아한다. 낯선 이들 앞에선 낯을 가리지만, 엄마 앞에서는 세상 해사하게 웃는 아가. 이모 생일이라는 말에 영상통화는 부끄러우니 동영상으로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하는 아이는 노란 옷을 입고 신나게 어깨를 흔들며 생일 노래를 불러주었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세상에 이 아이보다 무해한 인간이 있을까 생각했다. 간간히 동생이 보내오는 사진 속 말갛고 동그란 이마, 귀엽고 앙증맞은 코를 따라 앙 다물어진 입술까지 시선이 닿으면 나는 자꾸만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세상에 모진 것들, 고된 풍파들을 겪지 않고 이대로만 자랐으면….’ 잘 울지만 울지 말란 말에도 쉬이 그치지 않고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울고 나서야 그친다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떼쟁이구나, 하는 생각보다 정말 강단 있는 어른이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더 컸다. 눈치 보지 않고 내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울어버리고, 어떤 말에도 굽히지 않는 용기. 그런 것이 내게는 있었던가. 






 11월은 내가 태어난 달이다. 몇 년 전의 누군가와 생일을 요란하게 보내고 헤어진 적이 있다. 이제는 아득히 멀어진 그때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애인은 내 생일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생일이 마치 우리의 마지막 일 것 같다는 생각을 자꾸만 했다. 왜 자꾸만 최악의 생일을 떠올렸을까. 상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명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때 내가 느꼈던 그 끔찍함이라는 것은 내게 분명히 흔적을 남긴 것이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내 인생에 있지도 않고, 의미조차 없는 스쳐 지나간 사람이 남긴 기억이 왜 그저 즐겁기만 하고 싶은 날에 지독하게 떠올랐는지 할 수만 있다면 내게서 뜯어내고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싶었다. 


 나는 괴로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동생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생일이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그 기억이 떠오른다고, 영문도 모르고 망쳐진 날들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고. 동생은 그 사람 참 나쁘다, 하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나는 그 말에 고갤 끄덕였다. 나쁜 건 내가 아니었지. 나는 그저 다친 것뿐이지. 

 그리고는 동생에게 말했다. 삶에 새겨진 상처들은 흉터가 될 순 있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으니 동생의 막내딸이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나는 아이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했다. 동생도 그것이 걱정되기도 한다고 했다. 이미 상처로 자라난 어른들은 때 묻지 않은 작은 아이를 보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다가도 그런 걱정이 생기기도 하는구나.






 "너는 다시 태어나면 뭘로 태어나고 싶어?"

 "미친 거 아냐? 태어나서 인생을 다시 살아내라고? 어휴, 난 안 해. 그냥 이번 생으로 끝낼래."

 "어휴 진지충. 애초에 다시 태어난다는 게 말이나 되냐? 그냥 뭘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지 묻는 거지!"

 "안 태어날 거라니까?"

 "아니 꼭 태어나야 하는 상황이라니까?"

 "아이 씨… 그럼 엄마 딸로 태어나서 연애는 안 하고 친구만 몇, 상처라곤 모르는 고고한 어른으로 클래"

 "와… 진짜 시시하다."


 소박한 년, 하고 친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이내 그래 이만큼 고생했으면 다음 생은 네가 원하는 고고한 어른으로 커도 되지 뭐, 하고 말했다. 그런데 세상에 상처라고는 모르고 어른이 된 사람이 있을까? 하는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스파게티를 포크로 휘휘 젓던 친구는 사실 그런 건 없지, 하고 말했고 나는 고갤 끄덕였다. 


 "나는 이렇게 고장 난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들 나처럼 이렇게 삐걱대는 구석이 다 있는 게 아닐까?"

 "당연하지."


 그 후로 친구는 다시는 내게 다시 태어나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묻지 않았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만히 집안에 있는 물건들도 손을 타다 보면 흠집이 나기 마련인데 사람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어떻게 흠집 하나 없이 자랄 수 있을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자기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게 아닐까. 


 네 살 하고 몇 개월이 지난 동생의 막내딸도 지금의 엄마 나이가 되면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고 말간 어른으로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이 나에게 상처를 내도록 쉬이 허락하지 않는 단단한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적어도 매 순간 한걸음 내딛는 일이 큰 일인 이모 같은 어른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11월을 반쯤 지난 어느 날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