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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정 Jan 07. 2023

딸의 새해

사실 나는 딸인 게 싫지 않다. 


 연말이니 밥이나 한 끼 하자며 아빠가 다녀갔다.


 여름에 다녀가고 반년만이었다. 나는 집 정리를 시작했다. 거실에 놓아둔 엄마와 찍은 사진들을 모두 챙겼다. 옷장에 넣기 전에 엄마와 웃고 있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엄마가 이혼을 선언하고 내가 아빠에게 떠나기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상황이 워낙에 좋지 않아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때다. 내 고민에 지운은 어머니와 사진을 찍어두는 게 어떻겠냐고 했고 엄마, 나, 흰 강아지 그리고 지운은 함께 동네 공원으로 가 사진을 찍었다. 바람이 많이 불었고, 강아지가 카메라를 제대로 보지 않아 강아지를 안은 내 표정은 다급한데 엄마는 세상 해사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웃었다. 평소 같으면 나는 내가 잘 나온 사진을 골랐겠지만 그때는 엄마가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골랐다. 며칠 후 나는 비행기를 타며 지운에게 사진이 나오면 꼭 엄마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후에 엄마 근처에 살며 엄마 집에 갈 때마다 보는 둘만의 가족사진이 되었고, 엄마가 나를 떠나 외가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떠날 때 내게 왔다. 나이가 들며 둘이 함께 셀카를 찍는 일은 있지만 남이 찍어주는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고 예쁜 엄마는 그렇게 사진에 담겨 누구보다 화사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 눈에 슬픔이 담겨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나이가 한참 더 든 후의 일이었다.


 나는 너무 익숙해 의식하지 못하고 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엄마의 흔적들이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아빠가 자고 가게 될지도 몰랐고 그렇다면 불편함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하고 단 한 번도 아빠 앞에서 ‘엄마’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뱉은 적이 없다. 이혼하고 몇 년간은 아빠가 가끔 엄마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지만 나는 입을 꾹 다 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화를 내는 아빠가 너무 무서워서였고, 지금은 아빠든 엄마든 각자가 가장 편안한 상태로 지낼 수 있도록 돕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와는 가볍게 아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아빠와는 그럴 수 없음이 마치 나와 아빠의 거리를 말해주는 것 같아 슬프던 때가 있다. 하지만 여느 관계처럼 그것은 그저 자연스레 그렇게 된 일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나는 엄마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만큼 아빠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엄마의 존재를 말하거나, 흔적을 보게 되는 것이 불편할 아빠를 위한 내 나름의 배려다.


 아빠는 반년만큼 야위었고, 함께 온 동생은 그만큼 더 커져있었다. 식사자리에서 이제는 너네도 내일모레 마흔이니 미래를 잘 준비하라는 말에 이율이 높은 예금계좌를 하나를 추천해 주었는데, 집에 돌아간 다음날 계좌를 만들었다며 전화를 걸어온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제는 아빠도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전 같으면 내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어른이 된 자식이 하는 말도 흘려듣지 않는구나 싶어 조금 서글펐고, 한편으로는 조금 가까워졌다 싶었다. 새해까지 쉬려니 몸이 근질거린다는 아빠에게 우리 집에 며칠 더 있다가 가지 그랬냐는 말을 건네는 나도 많이 능청스러워졌다는 생각을 하며 결국 만나지 못하고 전화통화로 새해 인사를 나눈 엄마를 떠올렸다.






지금이야 엄마는 딸이 없었으면 어쩔뻔했느냐고 늘 이야기하지만 크는 동안에는 내가 아들보다 귀한 존재는 아니었다. 나는 줄곧 우리 네 가족사이에 동떨어진 존재였다. 동생은 엄마밖에 모르는 아들이었고, 엄마 역시 그런 동생을 사랑했다. 그리고 나와 아빠의 사이는 한 없이 멀었다. 그래서 모두 함께 집에 있던 때도 나를 두고 셋이서 외출을 하는 일이 많았다. 함께 가겠냐는 말도 없이 그냥 늘 있는 일이었다. 어떤 날은 그게 편했고, 어떤 날은 너무 남 같아서 서운하기도 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차별했다. 같은 잘못에도 늘 더 혼나는 건 내 쪽이었고, 무얼 해도 엄마와 함께 하는 건 동생이었다. 그럼에도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은 딸인 나에게 더 많이 쏟아졌다.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어서였을까, 아님 같은 성별이어서 본능적으로 감정이 더 닿아있다고 여겼을까. 다 크고도 내가 서러워할 때마다 엄마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고 버럭 화를 냈다. 그래서 그런 기억들은 저 깊숙한 마음의 바닥에 두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미안해, 너를 네 동생이랑 차별하며 키워서…."


 내가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걱정된 엄마가 용하다는 스님을 만나고 왔는데 스님이 가만히 엄마를 쳐다보더니 아들은 그렇게 귀하게 여기면서 딸은 왜 차별했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 말 못 하고 앉아있는 엄마에게 ‘하다못해 먹을 것조차도 아들이 먹고 싶다는 건 다 해주면서 딸이 뭐가 먹고 싶다고 하면 들어준 적도 없지 않으냐’고 하자 엄마는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고 했다. 딸은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상처들로 자신의 테두리가 분명해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결혼을 할 생각도 딱히 없는 것이라고, 앞으로도 결혼 문제는 엄마가 말 얹을 것도 없이 알아서 하도록 두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자꾸만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말할 때는 곧 죽어도 아니라고 하더니 처음 보는 스님 말은 믿네.’ 하니, 엄마는 무안한 지 웃기만 했다.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엄마에게 물었다.


 "근데 엄마, 정말로 더 좋고 싫은 자식이 있어?"

 "더 좋다, 싫다가 아니야. 내 배 아파 낳은 둘을 누군가는 더 사랑하고 덜 사랑했겠어? 엄마도 어려서 잘 몰랐었는데 그냥 그런 게 있는 것 같아, 싫고 좋다기보다는 내가 좀 키우기 편한 자식. 그리고 너는 엄청 독립적인 성격이니까…"


 나는 고갤 끄덕였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다루기 쉬운 딸은 아니었다. 엄마가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여 준 적이 없고, 늘 내 주장이 분명했다. 엄마는 한 배에서 낳은 자식이 어쩜 그렇게 다른지 신기할 지경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에도 동생은 심하게 낯을 가려 껌딱지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엄마밖에 모르는 아이였고, 나는 낯가림 하나 없이 온 동네 돌아다니며 모두에게 살갑게 구는 아이였다. 엄마가 시야 안에만 있다면 굳이 옆에 있을 것도 없이 자유롭게 다녔는데, 예쁨 받는 것을 좋아해 나를 귀여워하는 누구에게나 잘 안기는 어린이였다. 동생과는 전혀 성향이 달랐고, 그것은 자라서도 마찬가지라 부모로부터의 독립도 동생보다 훨씬 빨랐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오래도록 괴로웠던 그 차별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알게 되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우리 가족의 모든 문제들은 다 나를 거쳐야만 해결이 되던 것이, 아들은 여전히 아기 같고, 반대로 혼자서도 잘하는 딸에겐 굳이 입을 댈 필요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나를 조금 덜 신경 쓰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사실 깊게 파고 들어가 보자면, 낯선 사람에게도 살갑게 굴던 어린 다정은 부모님의 관심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르지만, 다 크고 나서 생각해보니 자로 잰 듯 똑같이 대한다는 게 가능할까 싶기도 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작은 내 성격이나 성향의 문제보다는 단순히 성별의 문제였을 것이다. 엄마는 첫아이인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낳았다고 했다. 오랜 진통 끝에 아이를 낳고, 딸이라는 말에 처치를 다 마치기도 전에 ‘아… 그러면 또 하나 더 낳아야겠네요.’ 하고 얘기했다던 말을 들으며 웃었지만 주변에 딸만 있어 어머니가 할머니께 구박받았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걸 보면 그 시대는 딸보다 아들을 더 귀하게 여기던 집이 꽤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성인이 되고부터 엄마고 아빠고 할 것 없이 딸부터 찾기 때문에 ‘클 때는 그렇게 차별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나만 좋아해’ 하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쓰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심 기쁜 마음이 드는 걸 보면 그런 결핍이 나를 더 혼자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도록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 같기도 해서 그냥 그랬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과거야 어쨌든 지금은 아들보다 나은 딸이 되었으니까. 






 딸이라는 존재는 참 이상하다. 나는 딸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엄마들에게 딸이란 나이가 어려도 기대고 싶은 존재가 되기도 하는 걸까. 정말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언니는 나보다 열 일곱 살이 많은, 딸이 둘 있는 아이엄마다. 언니와는 직장에서 처음 만났다. 커리어가 꽤나 짱짱하고 좋았지만, 결혼을 택하며 경력이 단절되었고 둘째를 낳고 백일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어 관계가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 둘째는 이제 열 살이 되었다. 언니는 아이 둘을 데리고 이혼을 하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고, 내가 일하던 회사에 입사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단 생각에 찜질방 카운터부터 시작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던 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언니는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함께 많은 시간들을 보내며 언니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데, 새해 인사를 전하는 내게 언니는 새해 목표가 이혼이라고 했다. 그간 이혼을 거부하던 남편이 이제는 손쓸 도리가 없다고 느껴졌는지 드디어 포기하고 이혼을 해준다고 했다며 잔뜩 들떠 이야기하는 언니를 보며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외도로 시작된 언니의 방황에는 짧은 썸과 연애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언니와는 일주일에 대여섯 번씩 통화를 했는데 ‘그 인간은 되는데 나는 왜 안돼? 너도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하는 질문을 정말로 많이 받았다. 나는 언니가 잘못하고 있다는 말 대신, 이혼부터 하고 자유롭게 사람도 만나고 연애도 하며 행복해지라고 했었다. 언니는 그때마다 ‘우리 큰 딸이 아빠 때문에 힘든 거 아니까 좋은 사람 있으면 만나보라고 했어. 걔가 날 다 이해한다니까?’ 하고 말했고, 나는 딸은 아마 언니를 이해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다.


 "너는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 어땠어? 그래도 지금 잘 사는 거 보면 그래도 부모님의 이혼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

 "당연히 안나쁘지. 둘이 함께 불행한 것보다 각자 행복한 게 자식입장에서도 훨씬 보기 좋아, 오히려 좀 더 일찍 선택하지 싶을 만큼. 근데 이혼했을 때,라고 이야기하면 괜찮지 않았지."

 "우리 딸이 지금 막 다른 사람 만나라고 그러고 자기는 다 괜찮다고 하고 다 커서 엄마를 위로하고 그러잖아, 근데 솔직히 애들이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 어떤 마음인지를 잘 모르겠어."

 "언니는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언니 딸이 지금 다른 사람 만나라고 그러고 다 괜찮다고 하는 게 전부 다 사실은 아닐 거야 아마. 설사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실제로 부모님의 이혼이 현실이 되는 건 전혀 다른 류의 문제야. 나도 엄마한테 늘 아빠랑 이혼하라고, 당장 이혼이 힘들면 엄마 예뻐하는 다른 사람이라도 만나보라고 이야기했었어."

 "너도 그랬어?"

 "응, 근데 엄마가 실제로 이혼을 한다고 내게 제일 먼저 말했을 때는 그대로 내가 깨져버리더라니까. 내가 상상한 그런 게 아니었어. 막연히 상상으로만 그 일을 생각하는 거랑 정면에서 오는 그 일을 내가 받아내야 하는 건 결이 문제더라고. 다 이해하는 척 언니를 위로해도, 그게 진심이라고 해도, 상처가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닐 거야. 지난 시간 동안 언니가 보아온 나만 봐도 그렇잖아."

 "하긴…. 네 삶만 보더라도 어려서 잘 모른다, 그런 건 말이 안 되지, 그렇지?"

 "응, 그러니까 언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까지는 헤어지고 나서, 다 정리하고 나서 해."


 너무 세세하게 그 과정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을 마치는 나를 보며 언니가 고갤 끄덕였다. 언니는 나보다 엄마나이에 가깝다. 사실 언니라는 호칭보다는 이모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러운 나이차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서로를 나이의 편견 없이 보고 존중하는데 가끔은 언니가 결혼 생활 내내 불행하던 우리 엄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니의 큰 딸이 온 힘을 다 해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던 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는 서로가 서로를 독립된 인간으로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파도는 언니의 딸들에게는 너무 높고, 좀 이기적이고 못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언니가 그것을 꼭 막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엄마의 짐을 같이 짊어지고 싶은 딸이었지만 그것은 내가 들 수 있는 무게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어른들의 싸움은 도전해보는 것으로 배움을 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엄마 역시 늘 엄마 편이라던 나를 등에 업고 이혼을 결심했지만, 나는 엄마의 결심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스러졌다. 과정은 어떤가. 엄마의 지난한 싸움 속에서 엄마의 손을 붙들고 있는 나는 엄마만큼의 괴로움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바람을 다 맞아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나빴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엄마는 나를 방패로 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혼은 포기해도 내 자식은 포기할 수 없는 마음, 그리고 이해한다는, 엄마의 곁에 있겠다는 그 다짐이 엄마에게 큰 힘을 주었을 것이다. 엄마는 내 존재가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 그걸 가지게 했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 아빠에게 정말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법한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게 좋았을, 그리고 듣고 싶지 않았던 어른들의 이야기까지 너무 많은 것을 알았다. 나는 모르는 척 모든 걸 외면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 동생의 태도가 훨씬 맞는 방식이라는 걸 모든 것이 다 끝난 후에 알았다. 당시에는 지밖에 모르는 못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스스로를 지키는 게 참 중요하단 생각을 오래오래 했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다시 한번, 그 슬프고 화가 나고 억울한 감정들은 어른인 내게 지금처럼 털어놓으라고, 한 번씩 통화하면 네다섯 시간씩 전화기 붙들고 있는 지금처럼 우리끼리 이야기하자고 했고, 언니는 내게 꼭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씩씩한 너를 보면 우리 딸들의 미래처럼 보여서 그래도 난 이혼할 용기도 생기고 힘도 나. 너도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꼭 이야기해. 네가 들어준 만큼 나도 네 이야기 들어줄 테니까, 꼭 꼭, 알겠지?’ 하고 말하는 언니가 참 고마웠다. 한참 어린 동생이 하는 이야기에도 그러겠노라 말해주는 그 마음이 참 귀했다. 올 해는 언니에게 쉽지 않은 한 해가 되겠지만, 매일 우리 엄마 이야기를 하며, 너무 부럽다고 말하는 언니에게 언니도 곧 그렇게 가볍게 훨훨 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언니는 꼭 그렇게 되겠다고, 그때는 함께 클럽에 놀러 가자고 했고, 나는 여사님을 받아줄 클럽을 찾아보겠다며 웃었다. 과정은 힘들겠지만, 의욕 넘치는 지금이 언니에게 두고두고 꺼내어 쓸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바라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눈 새해 인사들이 모두 의미 있었지만 엄마와 나눈 새해 인사가 참 좋았다. 혼자 살며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이 유일한 꿈이라는 엄마는 하루에 이만보씩을 걸을 만큼 스스로 건강을 잘 챙기는 사람이 되었는데, 새해 목표 역시 무조건 건강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아파트를 벗어나 수영장이 딸린 작고 아담한 주택을 사는 것이 목표라고 했고, 엄마는 내 소원이 꼭 이뤄지게 기도하겠다고 했다. 대화의 말미에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 올해가 가기 전에 해외여행 가자는 나의 말에 엄마는 ‘나는 우리 딸이랑 유럽여행하는 게 소원이었으니까 유럽에서 만나자!’ 하고 신이 나 말했고, 나는 유럽은 돈이 많이 드니까 어디 저기 섬나라 휴양지나 가자고 했다. 사실 내가 엄마와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마추픽추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한국 밖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던 그 시절부터 엄마가 말하던 엄마의 꿈, 마추픽추.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다던, 삼십 년도 더 지난, 엄마의 그 말이 어느덧 나에게도 꼭 이루어야 하는 꿈이 되었다. 올해는 여러 가지 상황도 있고 해서 여유롭게 마추픽추에 가는 일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하나씩 지워갈 목표들, 그 모든 것 위에 있는 엄마와의 마추픽추 여행을 생각한다.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이들이 모두 있는 힘껏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내가 제일 행복했으면 하는 욕심 가득한 바람으로,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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