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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Nov 10. 2022

이제 더 이상 여행 에세이를 읽지 않지만

김민철 [내 일로 건너가는 법]을 읽고



어려서 나는 틈만 나면 여행 에세이를 찾아 읽곤 했다. 고등학생 때는 바람의 딸 한비야에 빠져서 그녀의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1996)' 전집을 읽고 중국 유학기를 다룬 '중국견문록(2006)'까지 내리읽었다. 책 속의 한비야 씨는 어떤 나라에서든 기어코 친구를 사귀고, 그들의 문화 속에 비집고 들어갔다. 지구라는 주어진 세상을 야무지게 보고 즐기는 그녀의 삶은 열정적이고 즐거워 보였다. 그때 꿈꿨다. 먼 훗날 나도 이렇게 돌아다니며 살아볼 수 있을까?


비슷한 시기에 재밌게 읽은 책 중에 미애와 루이 318일 간의 버스 여행(2002)도 있었다. 낡은 버스를 고쳐서 세계를 누비는 패션모델과 사진작가 부부의 이야기였다. 어떻게 저 둘은 낡은 버스를 고쳐서 세계를 누비는 아이디어에 한뜻 한 몸이 될 수 있었을까? 이 정도는 마음이 맞아야 진정한 삶의 동반자인가 보다! 혼자 삶의 힌트라도 얻은 듯 큰 감명을 받아 버렸다. 물론 몇 년 뒤 두 사람이 이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아 생각보다 어른들의 세계는 복잡한 것이로구나, 하고 같이 복잡해지기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2000년 전후로 '배낭여행'이나 '세계여행' 같은 단어들은 청춘이라면 으레 해야 할 일들처럼 여겨졌고, 80년대 초중 반생 언니들 사이에서는 잘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나와서 퇴사 후 세계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들이 유행처럼 읽히곤 했다. 물론 나 역시 그들의 인생 후배이자 예비 보헤미안으로서, 도서관에서 그런 책들을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9시 뉴스나 대학교 취업센터에서 이야기하는 우리의 보편적인 미래보다 이쪽이 훨씬 재밌어 보였으니까.


그런데 이 당시 내가 오독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인생은 그래야만 특별하다는 것이었다.


아마 나는 그 당시,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지루하고 보편적인 나날들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삶이 있다고 말해주는 "장기 여행자의 이야기"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들은 내게 어떤 픽션보다도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줬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예감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여기 아닌 어딘가에 "진짜 삶"이 존재한다고 말했으니까. 마치 출국만 하면 모든 것들이 그럴 거라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지루한 건 내가 시시한 게 아니라 지금 여기가 시시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뒤로 나섰던 몇 번의 긴 여행과 짧은 해외 생활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진심으로 여행만을 예찬하고 사는 사람들과는 애초에 너무나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여행을 하면 할수록 한비야 언니 부럽지 않을 찬란한 우정과 이국적인 춤과 노래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건 즐거운 추억, 그뿐이었다. 돌아가면 신기루처럼 사라지거나 나만 아는 무용담이 될 것이 뻔했다. 어느새 나도 2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나를 대표하는 일도 갖고 싶었고, 돈도 벌고 싶었다. 삶에서 맞닥뜨린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저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해결하고 싶었다.


더 이상은 이렇게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상을 모른 척하고 낯설고 진귀한 맛이나 들뜨는 감성만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사람으로 살 수는 없었다. 삶의 터전을 바꿔버리는 해외 이민이라면 모를까, 막연히 길고 특별한 여행으로 지루한 일상을 덮어버리려는 전략은 건강한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줄곧 어딘가를 떠돌아다니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유달리 용감하거나 자유로운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삶에서 그런 프로젝트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나의 욕망을 쫓아야 했다.


그러다 2015년에 우연히 김민철 작가의 책을 알게 되었다. 즐거운 여행을 하고 돌아와 다시 그 힘으로 출근을 하고, 금방 또 퇴사를 마음에 품고 지중해를 동경하다가도 다시 자기 일에 몰두하는 김민철의 이야기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기 아닌 어딘가를 섣부르게 동경하면서도, 결국엔 울면서 자기 자리에 돌아와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의 삶을 책임지는 일‘의 현실판 레퍼런스로 여길 만 했다. 어쩌면 내가 이국적인 여행과 생활 사이에 유지하고 싶은 적당한 거리감이란, 그녀가 보여주는 딱 그 정도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모든 요일의 기록>을 그렇게 처음 만났고, 그녀가 곧바로 뒤이어 출간한 <모든 요일의 여행>을 읽었다. 당연히 <취향의 발견>도 읽었다. 최근에는 <치즈 :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도 읽었다. 매번 그녀의 신간을 읽을 때마다 하하, 이분 여행 참 자주 다니시네. 생각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여행 에세이와 달리 그 여정이 더 재미있었던 것은 여행 후에는 꼭 김민철 작가가 더 나은 태도로 자신의 자리에서의 지난한 일들을 처리하려 노력했음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행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삶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인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 그녀가 18년을 한 회사에 다니며 정리한 '일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내 일로 건너가는 법>이라는 제목의 그 책에서 그녀는 팀원들에게 사랑받고, 자신의 일을 무척이나 즐기는, 베테랑 팀장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여행을 좋아했고, 도자기를 만들거나 술을 즐기며 일상과 일의 균형을 맞춰나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일에 대해 쓰고 있지만, 결코 일에 대해서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여차하면 퇴사 카드를 쓰면 되니까 조직에서 언제나 자기 다운 의사결정을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하며,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말고 동료들을 믿고 의지하라는 당부를 건넸다. 또 언젠가 퇴사를 하게 될 테니, 자신이 꿈꾸는 삶을 위해 늘 딴짓을 하라는 상큼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어쩌면 오랫동안 작가 김민철을 기억하고 있는 내게, 이 책은 필연적으로 나와야 했던 책인지 모른다. 나는 그동안 김민철 작가의 여러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퇴사를 입에 달고 살고, 프랑스 지도를 인쇄해 책상에 붙여놓으며 엉덩이를 들썩 거리던 김민철 작가가 앞으로 어떤 상사가 되고, 관리자가 되는지. 역시 늘 퇴사를 입에 달고 살고,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지도를 인쇄해서 책상에 붙여놓던 나도, 앞으로 괜찮을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 직장을 18년이나 다녔다는 것은 신기하기만 하다. 역시 듣던 대로 TBWA라는 회사가 유달리 엄청 좋은 회사가 아닐까? 그녀 말대로, 박웅현 팀장과 같은 좋은 상사를 여럿 두어서 회사도 오래 다녔던 것일까?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내 일로 건너가는 법>에는 참 신기한 대목이 하나 더 있다. 김민철 작가가 팀장인 팀에서, 일부 팀원들이 다른 팀으로 이동하는 일화가 나올 때이다. 이때 팀원들이 너무 아쉬워서 눈물을 하며 우리 팀을 너무 사랑한다고 외쳤다는 것이다. 이때 나는 잠깐 책을 덮었다. 뭐야? 말도 안 돼. 절대 말도 안 돼.



이제 더 이상 여행 에세이를 읽지 않지만


여행은 특별해지기 너무 쉽다. 이국적인 풍경, 아름다운 자유 시간,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에게 베풀어지는 다정한 현지인들의 환대와 호의. 하지만 삶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흐른다. 오히려 여행 후에 돌아와 내가 있던 자리에서 각종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과 협력하며 그들과 의미 있는 성취를 만들어가는 일이야 말로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인생이 꼭 특별해져야 한다면,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오히려 그런 모습이다.


" 육체의 지중해는 지금도 여전히 나를 유혹한다. 끊임없이 그곳으로 오라 손짓한다. 반면에 정신의 지중해는 나를 지금 이곳에 살게 한다. 내 마음가짐에 따라 이곳이 지중해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바람이 불고, 달이 뜨고,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고, 그 모든 아름다움이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가, 나의 지중해다. "


김민철 _ <모든 요일의 기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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